44 20후독문헌

서로박: 아이히의 꿈들 (2)

필자 (匹子) 2018. 4. 6. 12:12

다섯 번째 꿈: 뉴욕에 사는 가정주부, 루시는 어머니를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어머니가 매우 반갑게 여겨집니다. 대화 도중에 그들은 어떤 기이한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어떤 곤충들이 무언가를 갉아먹는 소리였습니다. 곤충은 다름 아니라 흰개미들이었습니다. 흰개미들은 사람이든 집이든 닥치지 않고 갉아먹습니다. 뉴욕의 대부분 건물은 흰개미의 공격으로 인하여 서서히 내려 앉게 된 것입니다. 흰개미는 건물만 갉아먹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체내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파먹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입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루시뿐 아니라, 루시의 어머니 그리고 그미의 남편 역시 흰개미의 희생물이 됩니다. 뇌우가 울려 퍼질 때 집, 도시 그리고 전 지상이 폭삭 내려앉게 됩니다.

 

그렇다면 흰개미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서양의 문명은 인류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지만,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제 3세계 사람들은 억압과 살인 그리고 찢어지는 가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이히는 아마도 이를 지적하려고 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흰개미는 오늘날 뒤집힌 먹이 피라미드의 첨단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파국을 겪게 하는 객관적 상관물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생태계 파괴와 자연재해에 관한 관점입니다. 물론 아이히가 살았던 시대에는 환경 문제가 하나의 이슈로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뉴욕의 모든 건물이 흰개미의 공격을 받고 대부분의 인간이 이로 인하여 아마겟돈의 파국에 직면한다는 것은 생태계 파괴, 기상 변화 내지 자연 재해와 연결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국가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의 횡포입니다. 국가는 개개인을 이용하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지만, 개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안녕을 완전하게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권력 엘리트로서 모든 정책을 비밀리에 행합니다. 일반 개개인들은 모든 정책의 정립과 시행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국가의 정책에 귀를 기울이고, 시종일관 정당한 방법으로 비판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게 작품의 가장 중요한 전언일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대목에서 귄터 아이히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니, 잠들지 마, 적어도 세상의 지배자 활동하고 있는 한/ 널 위해 일한다고 거짓말하는 그들의 권력을 신뢰하지 마/ 너희의 마음 텅 비지 않도록 깨어 있어라, 이용당할지 모르니/ 불필요한 일 하라! 너희의 입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노래 불러라/ 불편한 자 되라! 세상사의 바퀴 속에서 기름 되지 말고 모래 되어라!”

 

아이히는 50년대 중엽에 여섯 번째의 꿈을 집필하였습니다. 두 번째 꿈이 독일 사람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사람들은 인간이 인육을 고아서 잡아먹는 중국의 이야기를 삭제하라고 지속적으로 항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히는 여섯 번째 꿈을 집필하여 두 번째 꿈을 삭제한 다음에 바로 그 자리에 삽입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부부는 터키의 어느 소도시를 여행하다가 호텔에 투숙하게 됩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부부는 실험 삼아 포도주를 연거푸 들이켜 봅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금 쿵쿵 하고 소리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부부는 모골이 송연해서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섯 번째 꿈은 그 자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1세계 사람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로움은 제 3세계 사람들의 피의 대가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춘향전에서 기술되어 있는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춘향전에는 “금존미주는 천인혈이며 옥반가효는 만성고 金樽美酒 千人血 玉搬佳酵 萬成膏”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인의 피요, 옥반위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고름이라는 것입니다.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의 부귀영화는 권력과 금력을 지니지 못한 자의 가난과 고통의 대가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히는 이러한 대립 구도를 가진 나라와 못 가지 나라로 확장한 셈입니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과 부귀영화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며, 경제적 대차대조표와 같다는 사항 말입니다. 누군가 부를 누리면, 이로 인해서 누군가 가난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자고로 꿈이란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현대인의 주어진 삶을 극복하게 하는 희망의 기능입니다. 이는 그 자체 긍정적인 기능이지요. 꿈과 희망이 없으면, 세상은 얼마나 각박하고 참담한 것일까요? 꿈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부여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기능도 존재합니다. 인간은 무언가 꿈을 꿈으로써 주어진 위험을 외면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는 꿈의 부정적인 기능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안온한 꿈을 꾸면, 현실적 고통을 잠시라도 망각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든 환경, 원시림, 소도시 등은 개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몽환적인 꿈에 빠져있거나 매몰되어 있서는 안 된다고 아이히는 믿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꿈들」의 마지막 대목에서 외칩니다. “깨어나라, 왜냐하면 너희들의 꿈은 사악하다.” “이미 주위의 철조망에는 전기가 통하고, 보초들이 진을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