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20후독문헌

서로박: 아이히의 '비테르보의 소녀들'

필자 (匹子) 2021. 3. 31. 14:49

귄터 아이히 (1907 - 1972)의 방송극, 「비테르보의 소녀들 (Die Mädchen aus Viterbo)」는 1953년 3월 10일 남서방송극 바덴바덴, 브레멘 방송국 그리고 남독 방송국에서 차례로 발표되었다. 아이히는 50년대 초반에 가장 활발하게 방송극을 집필하였는데, 이 작품은 아이히의 문학 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70세 노인 골트슈미트 그리고 그의 손녀, 17세의 가브리엘레는 유태인 피난민이다. 그들은 히틀러 정부에 의해 체포되지 않으려고, 베를린의 어느 주거지에 숨어서 살고 있다. 특히 골트슈미트는 지하실 아래에 있는 밀실을 발견하여, 손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목숨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일말의 희망 등이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그들을 내리 짓누른다. 너무 오래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골트슈미트는 찢겨진 신문 기사를 읽다가 기이한 내용을 발견한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비테르보 출신의 소녀들이 이탈리아의 문화 유적지를 탐사하다가, 고대 로마인들이 만들어놓은 지하 납골당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순간적으로 잠이 든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손녀에게 꿈속에서 접하게 된 환상적인 내용을 들려준다. 

 

골트슈미트의 이야기는 끊어질 듯 한 꿈속의 (가상적인?) 이야기의 편린들인데, 이것들은 주인공의 조심스러운 어조에 의해서 연결되고 있다. 비테르보 출신의 소녀들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혀서, 마치 두 사람의 대화자처럼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암시되는 것은 고유한 세계, 고유한 장면 등으로 가상적으로 화하여, 두 대화자의 이야기를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문 기사는 두 사람에게는 일종의 배 (船)와 같다. 골트슈미트와 가브리엘레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꿈의 대양으로 나아가게 되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꿈의 대양은 바로 로마의 지하 납골당의 영역을 가리킨다. 두 사람은 어느새 지하 납골당에 갇힌 소녀들과 동일한 느낌을 지닌다. 가브리엘레는 안토니아라는 여학생으로 둔갑하고, 골트슈미트는 바토리라는 담임교사로 변신해 있다. 두 사람만이 주체와 객체의 새로운 일원성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현실을 보다 더 명확히 관찰할 수 있다.

 

두 세계 (베를린 가옥의 지하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는 장면 순서대로 투영되고 있다. 이로써 줄거리의 구체적 내용은 상호 이전되고 서로 접목되고 있다. 상황과 상황은 서로 대립적으로 보완 작용을 일으킨다. 예컨대 지하 납골당에 갇힌 소녀들은 오로지 바깥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할 때 비로소 구조될 수 있다. 이는 골트슈미트와 가브리엘레가 처한 상황과는 정반대이다. 만약 누군가 유태인 두 사람을 발견하면, 그들은 유태인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처형되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구조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반면에, 주인공 두 사람은 타인에 의해 발견되기 말고 계속 숨어살기를 애타게 바란다. 갈망의 꿈과 두려움의 꿈이 여기서 모순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지하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처절하다. 그들은 추위, 목마름, 굶주림 등과 싸워야 한다. 두 주인공이든, 비테르보 출신의 처녀이든 간에 제각기 한계 상황 속에서 죽음과 직면해 있다. 골트슈미트와 가브리엘레는 숨어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나치에 의해 체포당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현실적 상황, 즉 비테르보의 소녀들의 처지 속으로 자신을 은닉시킨 것이다. 소녀들은 애타게 구조를 갈구한다. 두 사람은 소녀들의 처지가 되어 자신의 처지를 성찰하게 된다. 이로써 그들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깨달음이요, 나아가 끔찍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결국 게슈타포가 나타났을 때, 두 사람은 두려움 없이 “거기”에 있다. “할아버지 꿈에서 깨어나세요!”라는 가브리엘레의 전언은 맨 마지막에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라!”는 전언과 일치된다.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라”는 아이히의 전언은 처음부터 숙명론과는 다르다. 숙명론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따르려는 입장이라면, 아이히의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실 감각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뜻과 통한다. 아이히는 자신의 시에서 이에 관해 끊임없이 설파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귄터 아이히의 문학적 핵심 모티브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즉 “끔찍함과 좋은 친구인 자는 끔찍함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를 편안히 기대할 수 있다. (Wer mit dem Entsetzen gut Freund ist, kann seinen Besuch in Ruhe erwar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