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처 16

박설호: (3) 배금주의 비판, 아이티 항쟁과 프랑스 혁명

(3) 배금주의 비판, 아이티 항쟁과 프랑스 혁명. 니콜라스 기옌의 시를 중심으로 (앞에서 계속됩니다.) 6. B: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모든 혁명의 근원에는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저항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군요. A: 바로 그 점이 중요해요. 16세기 독일에서 발발한 농민 혁명 역시 가난한 농민을 착취하는 가렴주구로 인해서 촉발되었습니다.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의 사상은 저항이 없으면, 도저히 생각될 수 없습니다. 혁명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저항의 몸부림을 통해서 아래에서 위로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지요. B: 이제 콩고 아이티 항쟁과 프랑스 혁명 사이의 관계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 프랑스 혁명의 구호는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삼색기에..

12 세계 문화 2023.08.18

서로박: (4)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루터의 변절과 그의 언어적 폭력: 루터는 고위층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 성당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 성서 번역에 몰두하고, 세상사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루터가 보름스 성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고, 권력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체득한 죽음에 대한 위기의식은 이후 그의 정치적 행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후에 보여준 루터의 정치적 입장은 수구반동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령 루터가 독일 농민 혁명 당시에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농부들의 폭동을 천민들과 강도떼의 폭력적인 난동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루터는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서 체제 옹호적으로 처신한 셈입니다. 그의 짤막한..

26 유토피아 2023.04.02

서로박: (1)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1. 위대한 종교 개혁자, 라스카사스와 토마스 뮌처: 서양의 종교 개혁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서 라스카사스LasCasas와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가 손꼽힙니다. 그 이유는 라스카사스와 뮌처가 종교의 개혁과 정화 운동을 넘어서서, 주어진 현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 민초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라스카사스는 가톨릭 사제로서 신대륙에서의 인디언 학살과 제국주의의 비리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수없이 대서양을 횡단하였습니다. 뮌처는 16세기에 독일 농민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상의 천국을 선물하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힘없고 가난한 인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시대의 가장 끔찍한 모순을 고발하며 이를 ..

26 유토피아 2023.04.02

서로박: 뒤러의 '멜랑콜리아 I'

뉘른베르크에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 친애하는 J, 알브레히트 뒤러 (1471 - 1528)의 그림에 대해 커다란 애착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그림들은 신에 대한 깊은 신앙심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를 진지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유학의 기간 동안 뉘른베르크에 있는 뒤러하우스를 몇 번 찾아 갔습니다. 뒤러는 평생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가난과 폭정 그리고 종교개혁이 난무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예컨대 그가 21세가 되던 해에 신대륙이 발견되었으며, 46세가 되던 해에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고, 54세의 나이에는 독일에서 뮌처에 의해서 농민 혁명이 발발하였습니다. 뒤러는 자신의 개혁적 지조 그리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하..

11 조형 예술 2022.12.19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사회의 이슈 그리고 문제점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이를 언급하는 작가 - 그는 바로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1929 - )입니다. 그의 삶은 전형적인 지식인이자 비판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는 그의 시대적 감각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Er hat die Nase im Wind." (Habermas) 그렇지만 엔첸스베르거의 발언이 모조리 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의 작가 가운데에서 1929년 생은 참 많습니다. 철학자 하버마스, 엔첸스베르거, 하이너 뮐러, 크리스타 볼프, 밀란 쿤데라, 귄터 쿠네르트 등이 1929년생입니다.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는 1929년 남쪽 독일의 소..

9 문학 이야기 2022.09.01

서로박: 뮌처의 천년왕국설 (1)

1. 토마스 뮌처와 천년왕국설: 친애하는 M, 서양의 종교 개혁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루터와 칼뱅이 아니라, 라스카사스와 토마스 뮌처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토마스 뮌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천년왕국설의 혁명적 정신은 토마스 뮌처에 의해서 독일 농민 혁명으로 실천되었습니다.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 1489? - 1525)의 사상과 실질적인 운동은 먼 훗날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 Karl Mannheim의 영향력 넘치는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ie und Utopie』에서 다시금 상세하게 언급된 바 있는데, 이로 인하여 뮌처의 삶과 사상은 현대에 이르러 유토피아의 토론의 쟁점으로 점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현대의 정치경제학, 사회학 등을 전..

26 유토피아 2022.01.21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 서문

“사고는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일컫는다.” (Ernst Bloch) “블로흐를 비판하지 않은 채, 그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은 하나의 배반이다.” (편역자) "희망은 확신이 아니다. 희망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위험에 대한 의식이다.” (Ernst Bloch) 1. 친애하는 B, 블로흐 읽기를 연속으로 간행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이후의 진행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유토피아의 역사를 역사적 비판적 관점에서 기술하려는 의도는 세부 사항에 있어서 여러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연구에서 동양의 영역을 제외했음에도, 논의에 대한 고증 작업은 여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고로 학자는 -소설가와는 달리- 자발적 착상만으로 펜이 굴러 가는대로 글을 쓸 수 없으며, 사고가 하나의 결론에..

2 나의 글 2021.05.08

서로박: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서문

라스카사스는 왜 중요한가? - “사유 思惟는 사유 私有가 아니다.” (윤노빈) - 친애하는 J, 당신을 위하여 라스카사스의 연구서를 간행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에스파냐 출신의 신부이자 수도사인 라스카사스 (Las Casas)는 게오르크 지멜 (Georg Simmel)도 말한 바 있듯이, “인류의 가장 커다란 고통을 환기시켜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16세기 서인도 제도에서 오랫동안 자행된 가장 끔찍한 대학살의 생생한 증인이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약 1500만의 원주민들이 정복자의 총과 칼에 의해 학살당하는 것을 당국에 보고하였으며, 평생 고통당하는 인디언들의 생존을 위해 살았습니다. 만약 본서를 읽으면, 당신은 상기한 내용, 라스카사스의 신념과 신학적 입장 그리고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서 ..

24 신학이론 2021.01.06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4)

10. 사건의 기호학: 그렇다면 어째서 에코는 수많은 인용문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삽입했을까요? 이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들은 진리의 파편들로서, 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론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나 기호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됩니다. 즉 진리란 인간에게는 다만 기호로서 받아들여질 뿐이고, 사물의 본질은 찾을 수 없다는 결론 말입니다. 진리와 가치에 관한 문제는 기호와 소재라는 구조주의적 관심사에 의해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코의 소설은 철학적 존재론에서 말하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사물의 표피적인 면만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뮌처가 실천한 천년왕국의 혁명 (5)

26. 절대 권력, 실정법 그리고 민족주의: 실제로 독일 농민운동의 패배로 인하여, 근대 국가는 자신의 세 가지 위용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제후의 절대 권력, 절대적인 권한으로서의 실정법 그리고 민족주의를 가리킵니다. (Landauer: 67). 이러한 세 가지 사항은 계층을 용인하는 국가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고, 17세기 절대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게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막강한 종교 세력을 약화시키고, 초기 자본주의에 긍정적으로 자극을 가한 세력이 바로 황제의 권력이었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가톨릭 교황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절대 권력, 절대적 권한으로서의 실정법 그리고 민족주의에서 파생되는 애국심 등은 당시의 현실적 정황을 고려한다면..

38 중세 문헌 2020.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