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필자 (匹子) 2022. 9. 1. 10:14

사회의 이슈 그리고 문제점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이를 언급하는 작가 - 그는 바로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1929 - )입니다. 그의 삶은 전형적인 지식인이자 비판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는 그의 시대적 감각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Er hat die Nase im Wind." (Habermas) 그렇지만 엔첸스베르거의 발언이 모조리 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의 작가 가운데에서 1929년 생은 참 많습니다. 철학자 하버마스, 엔첸스베르거, 하이너 뮐러, 크리스타 볼프, 밀란 쿤데라, 귄터 쿠네르트 등이 1929년생입니다.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는 1929년 남쪽 독일의 소도시인 카우프보이렌에서 태어났는데, 주로 뉘른베르크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우체국장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주 도시를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엔첸스베르거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안 엔첸스베르거는 영문학자로 활동했는데, 2009년 사망했습니다. 울리히 엔첸스베르거는 베를린의 거주 공동체 "코뮌 1"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막내인 마르틴 엔첸스베르거는 1980년 폐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엔첸스베르거는 아버지가 공무원인 관계로 HJ 히틀러 유겐트 가담해야 했습니다. 히틀러 유겐트는 히틀러에 의해 만들어진 소년단이었는데, 이들은 부모를 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브레히트의 극작품 "제 3제국의 공포와 비참상 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s"에서 자세히 묘사된 바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6세였습니다. 그는 공항 근처에서 통역사, 바텐더일하면서 가족을 먹여살렸습니다. 엔첸스베르거는 다행히 장학금을 받고 에어랑겐, 프라이부르크,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1955년 클레멘스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의 연구로 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

 

 

 

 

 

 

 

그러나 나이가 들었을 때 엔첸스베르거는 서서히 독일이 얼마나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초기 시에서 자주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그의 마음속의 깊은 죄의식에 기인합니다. 비록 자신이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자신의 선조가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비판적 작가로 거듭나기 위한 선결 과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몇 년 간 노르웨이의 오슬로 표르드로 떠나 살았습니다. 오슬로표르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사이의 만 (灣)입니다. 일본인 작가 가운데에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 반성한 작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슬로표르드 만에 있는 어느 요양시설입니다. 이곳은 공기가 너무 맑아서 많은 환자들이 요양 차 관광 차 오슬로표르드를 찾습니다.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지만, 엔첸스베르거는 어느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을 깊이 사랑하여 그미를 따라 이곳으로 온 것 같아 보입니다. 1961년에서 1963년에 엔첸스베르거는 이곳에서 칩거하면서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엔첸스베르거는 처음에는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1957년에 발표한 시집 "양들에 대한 늑대의 옹호"는 즉시 세인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작품 속의 놀라운 풍자, 기발한 언어 구사 등으로 인하여 그는 차제에 브레히트를 능가하리라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인, 평론가, 소설가, 번역가, 출판업자 등 다양하게 활동하면서, 문학적 저변을 넓혀갔습니다. 위의 책은 "Deutschland Deutschland ueber alles"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는 독일"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서 한 나라는 다른 나라의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와 동등한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엔첸스베르거의 책 "Deutschland, Deutschland unter anderem"의 맨 마지막에는 "라스카사스 혹은 미래에 대한 기억"이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에스파냐 출신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16세기에 유럽의 정복자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살육하고 착취했는가? 하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에게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인종 학살 - 그것은 16세기 신대륙에서 자행되었습니다. 당시 서인도제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17세기 초에는 거의 황폐화되었습니다. 1200만에서 1500만의 인디언들이 백인 정복자들의 총과 칼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인종 학살을 막기 위해서는 정복주의 침탈을 차단시켜야 하는데, 이는 오로지 국가의 권력자들을 설득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Bildergebnis für verteidigung der woelfe gegen die laemmer

 

한스 마그누스가 1957년에 간행한 시집입니다. 서독은 미국의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한 죄악을 망각하고, 두둑한 월급봉투에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에 대한 항의로서 기인은 "양들에 대한 늑대의 옹호"라는 시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서 양들이란 등 따뜻하고 배 부른 소시민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정치적 비판적 의식을 견지하지 않고, 체제옹호적으로 그냥 살아갑니다.

 

 

 

 

 

 

 

1968년 서독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68 학생운동이 발발했습니다. 68 학생운동은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대학의 개혁을 추진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첫째로 베트남 전쟁의 문제점, 유럽 내의 엘리트 관료들의 과도한 불법 행위, 비상사태 등은 젊은 대학생들을 극도로 자극했습니다. 이로써 각지에서 데모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학생 운동을 통해서 교수, 직원 그리고 학생 동등한 권리로 학교의 모든 행정과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의 청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의 모습입니다. 그는 "베를린을 하나의 코뮌으로 만들자."하고 주창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수 우익단체의 사람에 의해 세 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두츠케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뇌를 관통한 총알은 그의 언어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두츠케는 아들, 호세아 두츠케 앞에서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독일어를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몇 년 후에 유명을 달리 합니다. 볼프 비어만 Wolf Biermann은 "두츠케에 향한 세 발의 총탄"이라는 시를 써서 보수 우익 단체, 서구의 매판 자본가 재벌 그리고 반공주의만을 표방하는 정치가들을 공격합니다. 그래, 루디 두츠케가 이카로스면, 비어만은 아들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다이달로스로 살아남았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사진은 쿠바의 아바나 항구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그 속에는 눈물젖은 빵을 씹는 노예의 가난, 착취와 압제의 역사가 은밀히 배여 있습니다. 1968년 엔첸스베르거는 68 학생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럽에 거대한 실망을 느끼고 잡시 쿠바로 떠났습니다. 사실 엔첸스베르거는 라틴 문학 그리고 라틴 역사에 정통한 작가로 일려진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가 자본주의 착취의 역사를 깊이 파고들다가 중남미 문화를 끊임없이 탐구했기 때문입니다. 

 

 

 

 

 

 

 

 

엔첸스베르거는 1965년부터 잡지를 간행해 왔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쿠르스부흐 Kurs-buch"라는 잡지입니다. 이 잡지는 68 학생운동에 간접적이지만 오랫 동안 기여한 지식인 잡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간행되고 있지만, 60년대 말에는 대단한 호응을 업었습니다. 현대 독일 문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두 개의 잡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동독에서 간행된 의미와 형식 그리고 쿠르스부흐입니다. 여담이지만 남한의 사상적 조류를 이어간 잡지는 장준하의 사상계, 임헌영의 대화,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김종철의 녹색평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 호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습니다. 런던 프랑스 그리고 아일랜드를 거친 타이타닉 호는 1912년 4월 14일 거대한 빙산과 충돌하여 서서히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미스 선장은 아이와 여인들을 우선적으로 구조하였고, 자신은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세월호의 경우는 어떠했나요?) 사망한 사람의 수는 무려 1500명에 달하고, 살아남은 사람의 수는 불과 710명이었습니다. 엔첸스베르거는 1978년 극시 "타이탄호의 몰락"을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끔찍한 사고를 통해서 20세기 문명 발전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가 발표한 소설 "무정부주의의 짧은 여름"이라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작가는 보나벤투라 두루티 (1896 - 1936)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두루티는 아나키스트로서 FAI 이베리아 반도의 아나키스트 연맹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 내전에서 프랑코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1936년 여름에 같은 편인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 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아군 가운데 일부 적대 세력에게 은밀한 총대를 겨누었는데, 이때 두루티가 당했던 것입니다. 두루티는 1936년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나키스트의 단체를 만들어, 폭력 국가 없는 사회를 건설했지만, 이는 불과 몇 개월 지속되었을 뿐입니다. 1936년 11월 두루티는 총을 맞아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엔첸스베르거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두루티를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이 영화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적은 전선 저쪽에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즉 아군 사이에서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엔첸스베르거의 정치적 발언들을 요약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1970년 엔첸스베르거는 "매체 이론에 대한 그림판"에서 매스컴을 의식의 산업이라고 규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문 방송은 인간의 의식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조종하는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사실 TV는 바보 상자이지요. 이러한 주장으로써 엔첸스베르거는 아도르노 그리고 호르크하이머의 매체 이론을 계승하여, 새로운 사회주의의 매체 이론의 가능성을 제기하였습니다. 둘째로 엔첸스베르거는 자신의 가상적 여행기 "아, 유럽"에서 오시 Ossi 그리고 베시 Wessi개념을 최초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개념은 과거에는 지역 사람을 가리키는 평범한 용어였는데, 독일 통일 후에 이 개념은 적대적 관계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로 엔첸스베르거는 2006년에 이슬람 테러를 언급합니다. 12세기 혹은 13세기에는 아라비아는 유럽보다 문화적으로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아라비아 사상가,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놀라운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아라비아의 문화는 그 이후로 발전을 거듭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 사제들이 자유로운 사상을 방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엔첸스베르거의 견해에 의하면 이슬람 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이 그곳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슬람의 급진적 무장 세력은 문화적 패배자나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엔첸스베르거의 이러한 주장은 아라비아 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 급진 무장세력의 사고는 이슬람 문화와는 별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슬람 Islam"은 말 그대로 "신에 대한 귀의"를 뜻하는 것으로서 겸허함, 순종 그리고 평화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엔첸스베르거는 이슬람 문화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담 후세인을 히틀러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그의 적대적 태도는 결국 독일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도 엔첸스베르거처럼 비판적인 눈으로 사회와 국가를 통찰하는 반골이 되시기 바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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