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서문

필자 (匹子) 2021. 1. 6. 11:21

 

 

라스카사스는 왜 중요한가?

 

- “사유 思惟는 사유 私有가 아니다.” (윤노빈) -

 

친애하는 J, 당신을 위하여 라스카사스의 연구서를 간행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에스파냐 출신의 신부이자 수도사인 라스카사스 (Las Casas)는 게오르크 지멜 (Georg Simmel)도 말한 바 있듯이, “인류의 가장 커다란 고통을 환기시켜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16세기 서인도 제도에서 오랫동안 자행된 가장 끔찍한 대학살의 생생한 증인이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약 1500만의 원주민들이 정복자의 총과 칼에 의해 학살당하는 것을 당국에 보고하였으며, 평생 고통당하는 인디언들의 생존을 위해 살았습니다. 만약 본서를 읽으면, 당신은 상기한 내용, 라스카사스의 신념과 신학적 입장 그리고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서 말하고 싶은 필자의 시대 비판 등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루터 (Luther)와 칼뱅 (Calvin)을 종교 개혁자로 익히 알고 있지만, 라스카사스와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는 잘 모릅니다. 라스카사스와 뮌처는 같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16세기 초의 유럽은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변혁을 원했으며, 신대륙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뮌처가 마치 녹두장군 전봉준처럼 독일에서 농민 전쟁을 이끈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면, 라스카사스는 약 500년 전에 인종, 평화공존 그리고 기독교 선교 사업 등에 관하여 고뇌하고, 오로지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펼쳐나갔습니다. 우리는 반공주의의 악영향으로 두 분을 잘 모릅니다. 한반도에서 루터와 캘빈만이 소개된 것은 참으로 기이합니다만, 유럽의 진정한 종교 개혁가는 뮌처와 라스카사스였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에스파냐 출신의 정복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헌신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부의 축적은 수많은 무고한 인디언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졌습니다. 서인도제도에서는 1510년부터 1550년 사이에 천오백 만에서 이천 만에 해당하는 원주민들이 총과 칼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문제는 라스카사스가 특히 서인도 제도에서 저지른 동족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에스파냐 역사가들에 의해서 “동족을 더럽히는 자 Nestbeschmutzer” 내지는 매국노로 비난당했습니다. 그의 묘지는 지금도 에스파냐 인종주의자에 의해서 계속 손상되고 있습니다. 조국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게 라스카사스의 묘지 훼손의 이유라고 합니다.

 

사필귀정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한 인간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완전히 해결되거나 밝혀지는 경우는 드물기 마련입니다. 역사적 죄악은 유감스럽게도 당대에 분명히 척결되거나 청산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친애하는 J, 어쩌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항변할지 모릅니다. 라스카사스 연구는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라스카사스에 관한 연구는 우리의 몫이 아닐지 모릅니다. 마치 조선인 징용 및 정신대에 관한 연구가 누구보다도 양심 있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진척되어야 하듯이, 라스카사스 연구는 우리가 아니라, 유럽의 백인들, 특히 에스파냐 사람들에 의해서 이행되어야 마땅할지 모릅니다. 선조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해자의 반성 행위는 참으로 껄끄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머나먼 과거에 먼 이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당신과 같은 역사학도가 그것에 대해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오히려 당면하지 않는, 우리와 무관한 역사적 사실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어떤 가르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J, 라스카사스 연구는 당신에게 어떤 긍정적인 모범의 상을 제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경고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가령 역사적 진리가 항상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기에 키케로는 “역사는 삶의 마이스터이다 historia magistra vitae.”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인종 탄압은 앞으로 지구상에 얼마든지 빈번하게 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구조적 모순의 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다섯 부류의 분들을 염두에 두면서 집필에 임해 왔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서구를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젊은이들입니다. 물론 유럽은 누구나 한 번쯤 여행할만한 지역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브레히트의 문장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낭만적으로 멍하니 바라보지 말라! (Glotzt nicht so romantisch!)”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사항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즉 눈앞에 전개되는 유럽의 모습은 제 1세계의 가면에 불과하며,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 그들의 진면목이 숨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공산주의자를 뿔 달린 괴물로 상상하는 나이든 분들입니다. 대체로 보수적 태도를 취하는 기성세대가 과거에 그렇게 믿곤 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체제 옹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변화를 싫어합니다. 물론 그들의 견해에도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반공주의로 고초를 겪은 자들은 남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가난한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후손들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여러 소시민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태반이지요. 하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정치가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끝내 지켜주지 않는 정치가들에게 권력을 헌납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하려는 분들은 한 명도 없지만, 권력과 금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주 기만당하곤 합니다. 또한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고로 무지와 편견은 노예근성을 낳습니다. 가령 백인에게 저자세를 취하고, 흑인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생각해 보세요. 몇몇 사람들은 높은 사람에게 굴복하고, 낮은 사람에게 거드름을 피우곤 하지요. 이는 노예근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매사를 판단하고, 권력과 금력으로부터 이용당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곧고 공정한 견해를 반드시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주로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몇몇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어째서 유독 미국에서 공부한 분들은 귀국 후 미국의 이익에 앞장서는 것일까요? 어용학자들은 여왕벌 주위에 원을 그리는 수벌들처럼 권력과 금력의 주위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선언하는 대신에, 자신이 중도파 내지 중립적 양비론자라고 공언하곤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이미 기울어 있는 시소 위의 상황입니다. 중도파의 중립적 양비론은 이미 기울어진 시소 위에서 그어진 수직선과 같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수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비스듬한 선에 불과하지요. 매판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수구적 입장을 철회하길 바라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부류는 처음부터 스스로 독자적 존재이기를 포기하는 일부의 여성들입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여성들은 오래 전부터 남성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마취되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굳이 페미니스트들의 타당한 발언을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여성들의 눈과 귀는 여전히 꽉 닫혀 있지요. 이들이 부모, 남편, 혹은 가족들의 통념과 관습에 맹종하는 한, 남녀평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은 참으로 요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 20년 전부터 많은 여성들이 한반도 내에 온존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려고 애를 썼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발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입신하려는 여성들이 많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이재무 시인은 「석모도의 저녁」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얼마나 더 큰 죄를 낳아야/ 세상에 지고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시인은 시구에서 자신을 반성하면서, 어떤 말 못할 죄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탓임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토로는 차제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용서하지도, 탓하지도 않겠다는, 어떤 확고한 다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거대한 사회적 죄악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권력 내지 금력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로써 파생되는 부당한 폭력에 대해 마냥 팔짱끼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항과 거역이야 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근본적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령 먼 훗날 거짓으로 판명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현재 우리가 신뢰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라스카사스는 이판理判이 아니라, 사판事判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도서관에 파묻혀 학문에 몰두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문헌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었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평생의 작업을 통하여 많은 문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집 (Obras completas)은 15권이 넘으며, 생전에 그리고 그의 사후에 수많은 적들로 인하여 간행되지 못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지금까지 남한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되었을 뿐, 아직 본격적인 연구서가 한 권도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약 40년 전부터 서양의 인문학을 공부해 왔으나, 아직 철학자가 아니며, 서양사 전공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럼에도 내가 저지르는 출간의 만용 (?)은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부디 부족한 나의 책이 라스카사스 연구의 입문서로 작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집필을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안산에서 필자 (匹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