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뮌처의 천년왕국설 (1)

필자 (匹子) 2022. 1. 21. 16:27

1. 토마스 뮌처와 천년왕국설: 친애하는 M, 서양의 종교 개혁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루터와 칼뱅이 아니라, 라스카사스와 토마스 뮌처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토마스 뮌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천년왕국설의 혁명적 정신은 토마스 뮌처에 의해서 독일 농민 혁명으로 실천되었습니다.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 1489? - 1525)의 사상과 실질적인 운동은 먼 훗날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 Karl Mannheim의 영향력 넘치는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ie und Utopie』에서 다시금 상세하게 언급된 바 있는데, 이로 인하여 뮌처의 삶과 사상은 현대에 이르러 유토피아의 토론의 쟁점으로 점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현대의 정치경제학, 사회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은 토마스 뮌처를 종교적 유형의 혁명 운동의 대변인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렇지만 토마스 모어 등과 같은 유토피아주의자들이 합리적으로 설계한 이상국가의 상 그리고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에 바탕을 둔 혁명 운동 사이에는 어떤 커다란 간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2. 뮌처의 강인하고 짧은 역정: 토마스 뮌처는 토마스 모어와 동시대에 살았지만, 처음부터 학문을 통해서 인민을 계도하려는 인문주의자라기보다는, 깊은 신앙을 지닌 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으로 뜨거운 논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천년왕국설에 입각한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혁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뮌처에게 신학과 사회 혁명은 별개로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연도는 불분명합니다. 혹자는 그가 1489년에 탄생했다고 합니다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신비주의자들의 문헌을 접한 뮌처는 사회적 평등에 관해서 깊이 숙고하였습니다. 1513년에 마치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 뮌처는 교황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모아서 열광적인 어조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톨릭 수사로 봉헌되었습니다.

 

3. 루터와의 갈등: 처음에 뮌처는 종교 개혁의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츠비카우에서, 나중에는 프라하와 튀링겐 지방의 소도시 알트슈테트에서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끝내 결별을 선언하고, “선택된 자들의 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루터와 뮌처의 믿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문헌으로 여기고, 이를 중시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뮌처는 신앙인의 마음속에 태동하는 성령의 존재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에크하르트 선사 Meister Eckhart , 요한네스 타울러 Johannes Tauler 등의 신비주의 사상과 슈바벤 경건주의의 신앙과의 관련성 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게다가 루터는 기득권을 지닌 고위층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농부들의 폭동을 천민들과 강도떼의 폭력적인 난동이라고 규정하면서,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서 체제 옹호적으로 처신하였습니다. 그의 글, 「살인과 강도짓을 저지르는 농부들의 무리에 대항하여 Wider die mörderlischen und räuberischen Rotten der Bauern」를 읽으면, 우리는 그의 사고가 초기의 종교개혁의 정신으로부터 기회주의적으로 멀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루터는 수사로서의 계율을 깨뜨리고,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자식 여섯을 낳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다 “일주일에 두 번 성관계는 그미에게 그리고 나에게 나쁠 것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문제는 루터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의 자세를 견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그의 글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에 관하여 Von den Jüden und ihren Lügen 」(1543)에서 극에 달해 있습니다.

 

4. 농민 혁명과 실패: 뮌처는 일단 뮐하우젠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이곳에서 1523년에서 1525년까지 농민 혁명을 실천하였습니다. 특히 남부 독일의 농민들은 뮌스터의 재세례파 사람들과 합세하여, 제후들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1525년에 작센 공작과 필립이 이끄는 정규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였는데, 바로 이때 뮌처는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에, 35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임신한 그의 아내는 겁탈당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지속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뮌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블로흐: 122). 뮌처의 설교에 의하면 천국은 저세상이 아니라, 지상에 건설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시들게 할 것이며, 거대한 전복에 동참하는 자는 영원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5. 농민 혁명의 실패: 독일 농민 혁명의 실패는 한마디로 혁명의 전략과 조직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뮐하우젠에서 뮌처는 재세례파 사람들과 의견을 합치시키는 논의 과정에서 하인리히 파이퍼Heinrich Pfeiffer와 약간의 의견 대립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북독의 권력자들에게 체포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는 거사의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도록 작용하였습니다. 뮌처는 취조의 과정에서 혁명의 실패가 기독교 정신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부 농민들의 사리사욕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온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북독의 재세례파 사람들은 남쪽 독일 지역의 농부들과 힘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단결된 모습으로 전략을 짜지 못했고, 이는 결국 조직적 와해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뮌처는 뮐하우젠에서 농부들에게 귀금속과 현금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일부 농부들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소시민적으로 재화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