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4)

필자 (匹子) 2020. 9. 4. 15:10

10. 사건의 기호학: 그렇다면 어째서 에코는 수많은 인용문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삽입했을까요? 이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들은 진리의 파편들로서, 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론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나 기호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됩니다. 즉 진리란 인간에게는 다만 기호로서 받아들여질 뿐이고, 사물의 본질은 찾을 수 없다는 결론 말입니다. 진리와 가치에 관한 문제는 기호와 소재라는 구조주의적 관심사에 의해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코의 소설은 철학적 존재론에서 말하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사물의 표피적인 면만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에코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의 파편 속에 담긴 내용 (기의, signifié)이 아니라, 진리의 파편을 다만 기호 내지는 부호 (기표, signifiant)라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에코의 소설은 서구의 이른바 오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차원을 넘어서 (서영채: 149), 오성의 가치 체계마저 깡그리 부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에코는 역사를 인과율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작가는 윌리엄의 혀를 빌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의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인과 관계의 기나긴 사슬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마치 하늘 위로 마구 지어 올리는 바벨탑과 같이 허황된 일로 보입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11. 역사적 장식용으로서의 인용 혹은 부호: 역사란 그 자체 당대의 진리와 고뇌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인용될 수 있는” 현상적인 소재로서 일회적으로 이용될 뿐입니다. 따라서 에코에게 역사는 오늘날 현실에 어떤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선별적 자료가 되지 못합니다. 역사에 대한 에코의 입장은 이 점에 있어서 미셸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주장한 바 있는 입장과 거의 유사합니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역사는 하나의 구조 속에서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조란 역사적 진보에 대한 불신 내지는 의심 등에 인해서 구성될 수 있는 무엇입니다. 가령 윌리엄이 브룬넬루스의 흔적을 추론하는 것도, 도서관 내부의 “아프리카 끝”에 도달하는 것도 오직 기호를 통한 깨달음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연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에코의 소설에서 역사적 사건은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혹은 다양한) 의미를 시사해 주는 소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식용으로만 쓰일 수 있는 현상적 소재에 불과합니다. 제반 역사적 사건들은 에코에 의하면 가장 근접한 대상에 대해서만 단순히 연결고리로서 기능할 뿐, 전체적 시스템으로서의 보편적 특징을 전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에코의 이러한 입장의 배후에는 제반 목적론적 역사관 및 유럽 사고를 지배해 온 전통적 역사 철학의 체계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에코의 소설은 -주제 상으로 그리고 소재의 형상화 방법 등을 모두 고려할 때-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언급되는 표피적인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사물의 본질을 찾으려는, 이른바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의 기본적 방향을 완전히 배격합니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소위 지식 사회학이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고 의심하고, 거짓된 예언자들에 대한 카를 포퍼의 경고에 동조하며, 결국에는 (소위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에 이르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세계관이 거짓되다고 주장합니다. (Schmidt: 12).

 

 

12. 종교가 분화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는 에코의 소설을 단순한 읽을거리에로 취급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에코의 소설은 근본적인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몇 가지 단초들을 제공해 줍니다. 가령 에코가 묘사한 가톨릭 종파의 변모 과정이라든가 종교적 이단 파들의 흐름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모든 이데올로기의 발전 과정과 묘하게 평행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령 중세의 기독교가 이단적 교파들로 분화되는 까닭은 그 자체 종교적 교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종교가 분화되는 이유는 주어진 현실의 비참함에 기인합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천 과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종교적인 교리는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금력과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민중을 억압하는 무기로 화하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교리를 거부하면서, 아울러 예수의 혁명적 가르침대로 사회를 정화하려 한다면, 이는 이단으로 취급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금력과 권력을 쌓기 위하여, 겉으로는 교리나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13.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은 어째서 죽음을 초래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사항에 있습니다. 에코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윌리엄은 제자 아드손에게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자들의 노력은 어째서 죽음을 초래하는가?”하고 묻습니다. 아드손이 대답하지 못하자, 윌리엄은 “그들의 추종자 때문이지”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물론 탁월한 이념은 우매한 민중들의 행위 때문에 때 묻거나,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노력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유토피아의 정신을 깡그리 부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추종자 혹은 밀고자에 의해서 세계를 정화하려는 고결한 이상은 약화되고 배반당하기도 합니다. 돌치노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예수, 토마스 뮌처 그리고 전봉준 등의 최후에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이상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은 이성의 힘으로 도서관의 비밀을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눈먼 호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서관의 비밀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마지막에 도서관이 불타버리게 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 무척 상징적입니다. 이렇듯 이성의 힘을 빌어서 진리에 도달하려는 윌리엄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도서관이 파괴되고 거대한 화염으로 휩싸인 사원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는 “신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 (Non in commotione Dominus)”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