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필자 (匹子) 2023. 1. 28. 10:52

미셸 푸코는 인간 주체가 여러 사회적 국가적 기관에 의해 어떻게 이용당하고 자신의 고유한 자유를 구속당했는가를 추적해 왔다. 개인의 권리가 국가 기관에 의해 우롱당하고 억압당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나타난 바 있다. 푸코의 관심사는 특히 감옥, 성의 억압,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는 지식 등으로 향하고 있다. 그 까닭은 감옥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로서, 그 자체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추악하게 작용하는 도구적 이성의 횡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의 견해는 『계몽의 변증법』에 서술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일단 지식과 권력에 관한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식과 권력은 푸코에 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으로 역사 속에서 기능하는 무엇들이다. 권력은 지배 세력이 휘두르는 무기도 아니며, 저항하는 인민의 무력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푸코에 의하면 완전한 실체로 드러난 적이 없고, 한 번도 특정 세력 내지는 단체에 일방적으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적도 없다. 물론 저항이 푸코에게는 하나의 권력 형태로 드러날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그룹을 대변하지 않으며, 그 세력 역시 미약햘 뿐이다. 한마디로 권력은 항구적인 관점에서 고찰할 때 특정 그룹을 적 내지는 아군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권력은 특정 그룹에게 해당하는 힘 내지는 에너지가 아니다.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계급투쟁 내지는 잉여가치 등과 같은 경제적 모순 구도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 속에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매듭이다. 그렇기에 푸코가 추적하는 결론은 주체의 파괴, 도구적 이성의 횡포, 그리고 지식인의 영향력이 붕괴했다는 사실 그 이상을 말해주지 못한다. 블로흐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수 있는 자유의 나라를 찾으려고 했다면, 푸코는 그저 어떤 역설적인 질문만을 던질 뿐이다. 가령 이러한 질문은 전체주의의 사회 내지는 국가에서 주체의 종말이 도래하였으며, 인간의 고유한 자유를 고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가리킨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푸코가 지향하는 세계관에는 일견 염세주의적이며 체념적 결정론의 특성이 엿보인다. 왜냐면 푸코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동의 노력은 그 자체 헛된 꿈일 수 있으며, 전체주의적 폭력을 동반한다고 처음부터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 헤테로토피아는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제 현실로서 주어진 사회 구조와는 다른, 혹은 반대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구적인 의미를 고려할 때 “다른 장소”로 바꾸어 활용될 수 있다. 유토피아는 푸코의 경우 어떤 이상적 사회 형태 속에 서성거리는 무엇이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린아이들은 지배 구조에서 벗어난 “反-공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곳은 예컨대 처마 지붕일 수 있고, 인디언의 천막 내부일 수도 있다.

 

푸코는 사회가 강요하는 지배에서 벗어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라고 명명한다. 푸코는 구체적 예로서 청년 수련원, 양로원, 요양원, 감옥, 정신병동, 군대의 막사, 묘지, 영화관, 극장, 정원, 박물관, 도서관, 축제로 활용되는 들판, 숙박시설, 홍등가, 여객선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밖에 거울에 비친 상도 언급되고 있다. “거울”은 유토피아도 헤테로토피아도 아닌, 어떤 사이의 공간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헤테로토피아, 다시 말해 “다른 장소”에서는 주어진 사회의 규범과는 다른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헤테로토피아 가운데에는 엄격한 질서와 통제가 자리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원형 감옥 내지는 정신병원이 그것들이다.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헤테로토피아는 그곳의 구성원들에게 어떤 성찰 내지는 주어진 사회의 규범 속의 문제점 내지는 모순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에 의하면 주어진 사회 내의 다른 부분적 현실을 가리킨다. 이곳은 주어진 현실의 질서와는 약간, 혹은 많이 차이가 나는 특별한 질서의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현재 상태 status quo” 속에 은폐된 문제점을 반영한 개념이 아니라, 주어진 현재 속에 실제로 자리하고 있는 구체적인 다른 현실이라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헤테로토피아는 역사철학의 관점에 유토피아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 속에 담겨 있는, 하나의 다른 특성일 뿐이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푸코는 지금까지 고전적 유토피아에 관한 위대한 서사를 비판한다. 고전적 유토피아에 관한 위대한 서사는 푸코의 견해에 의하면 항상 체제 내지는 규범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주어진 공간에서 벗어난, 역사철학적 관점에 의해 토대를 둔 유토피아의 시간 지평이었다고 한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의 희망은 피억압자들에 의한 공동의 노력에 기초해 왔는데, 푸코는 이러한 노력을 개별화하고 분산시킨다. 푸코는 모든 것을 주어진 전체적 구도로 세밀하게 분할된 구도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만약 유토피아를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면- 부분적 유토피아로서의 헤테로토피아, 즉 신체 일부에 해당하는 영역 유토피아뿐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푸코의 방식으로 고찰한다면, 유토피아는 어떤 특정한 부호로 변형된 채 현실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가 근본적으로 주어진 세상에 대해 아무런 변화를 촉구하지 않는 식으로 작동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푸코의 견해는 란다우어의 그것과 차이를 드러낸다. 란다우어는 역사에 나타나는 일-직선적인 진보를 거부한다. 왜냐면 진보는 “유토피아Utopia와 “토피아Topia” 사이의 점진적인 관계 속에서 때로는 주어진 정황에 따라 뒷걸음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란다우어는 유토피아와 토피아 사이의 변형 단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혁명의 사건을 중시한다. 그렇지만 푸코의 경우 혁명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며, 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의 변증법적 단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혁명이란 푸코의 경우 기껏해야 역사의 운동 메커니즘의 첨예한 유희 유형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푸코는 전체적 차원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의 노력 자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푸코의 사고는 과거의 고전적 유토피아주의자들과는 정반대의 대열에 편입되고 있다. 그렇다면 푸코는 인간이 갈구하는 마지막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면 유토피아의 사상적 촉수가 푸코의 경우 부분적으로 그의 담론 이론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푸코는 담론에서 무엇보다도 화자에게 주어진 발언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어에 의하면 “용기 있는 발언παρρησια”으로 명명되는 무엇이다.

 

진리는 데카르트에 의하면 결코 거부당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 의하면 거짓말하는 다수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이 진리를 전하는 용기 있는 인간의 발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테면 백 명의 까마귀 앞에서 한 명의 백조는 얼마든지 무력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견해에 의하면 “용기 있는 발언”만이 품위 있는 인간의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준다. 거짓과 회유 공작, 이익을 추구하는 농간은 결코 진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담론의 궁극적 목표를 고려할 때 하버마스가 말하는 바람직한 의사소통의 실현을 위한 민주적 토대와 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모든 것은 사회 내에서 거짓과 술수, 기만과 술책을 떨치고, 오로지 이해 관계를 초월한 참다움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관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