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4)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4. 10. 13. 09:16

(앞에서 계속됩니다.)

 

23. 라블레의 시대 비판: . 휘황찬란한 만화경의 상의 배후에는 작가가 처한 시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라블레는 특권 계급을 비판하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특권 계층의 유토피아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가령 텔렘 사원은 철저히 외부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가령 위선적이고 경건한 척 하는 수사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의 피를 빨아먹는 법률가 그리고 법을 어기고 진리를 은폐하는 공무원들은 이곳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고리대금업자 역시 절대로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블레의 사악한 특권계급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읽을 수 있습니다.

 

24. 찬란한 삶과 무제한적인 자유를 묘사한 명작: 혹자는 “성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리면서 살라.”라는 디오니소스의 전언이 때로는 방종과 타락을 조장하는 게 아닌가? 하고 지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처음부터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사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교양을 지니고, 선한 품성을 간직하고 있는 고결한 인간군입니다. 설령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느끼는 바를 실천하라.”는 계명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보함으로써 이웃을 배려할 줄 압니다.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간에 “종심소욕 従心所欲”을 행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갈등은커녕 결코 어떤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질투의 감정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Rabelais: 178). 기실 풍족한, 억압 없는 삶이 태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관료주의의 찬란한 유토피아에 대한 놀라운 범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 자아는 스스로 “자아”를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분으로서의 공동체이며, 공동체의 일부가 자신이고 이웃이며, 가족이고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25. 요약: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시대의 유토피아가 내세우던 패러다임과는 반대되는 하나의 가상적 유토피아의 상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국가의 강령이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을 다스리는 규범이 모조리 개개인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들은 위로부터의 간섭 없이 물질적 재생산의 부담을 느끼지 않은 채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들의 경제적 삶과 삶의 토대를 책임지는 자들은 농부, 수공업자 그리고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단순한 사람들이지요. 그렇기에 라블레의 유토피아는 봉건적 관료주의의 토대 하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특권층의 유토피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놀라운 사항은 작가가 특권층 가운데 선하고 양심적인 지조를 지닌 특권층을 찬양하고, 사악하고 비열한 특권층을 집요하게 비판한다는 사항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라블레가 계층의 구분을 철폐하고 만인의 행복을 문학적으로 찬란하게 묘사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26. 텔렘 사원 공동체: 라블레의 텔렘 사원 공동체는 문학 유토피아의 범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공동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어떤 사회적 의무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무제한의 자유는 공동체 내에서는 일부 제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 텔렘 사원 공동체는 하나의 기이한 조적으로서 잠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1920년 알레이스터 크롤리라는 사람은 시칠리아의 세팔루 근처에서 농가를 변형시켜서, 사이비 텔렘 공동체를 개설하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시골의 코뮌과 같습니다. 여기서 크롤리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라는 계명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심령학 센터를 만들어서 마법적 제식을 행하게 하였는데, 많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문제는 공동체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점, 공동체 사람들이 마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대학생이 이곳에서 마약을 복용하다가 사망했는데, 이로 인하여 공동체는 출현한 지 3년 만에 와해되고 맙니다.

 

텔렘 사원 공동체가 실제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 하나는 공동체 회원들이 고결함과 신의를 지녀야 하며,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풍족함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행하는 자유는 타인에 대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텔렘 사원이 노예들의 도움 없이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 모델이라 하더라도 노예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하자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결한 신의 그리고 경제적 특권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텔렘 사원 공동체는 실제 현실에서 추악한 구설수에 시달리거나,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 라블레, 프랑스와 (2004):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유석호 역, 문학과 지성사.

- 라블레, 프랑스와 (2017): 가르강튀아, 진형준 역, 살림.

- 유석호 (1995):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 삶의 형태. 라블레의 텔렘므 수도원을 중심으로, 실린 곳: 인문과학 제 72집, 연세대 인문과학 연구소. 87 – 104.

- Berneri, Marie Louise (1982): Reise durch Utopia, Berlin.

- Heintze, Horst (1974): François Rabelais, Leipzig.

- Köhler, Erich (1959): Die Abtei Thélème und die Einheit des Rabelais’schen Werke, in: Germanisch- Romanische Monatsschrift 40, 105 – 118.

- Rabelais, Francois (1974): Horst und Edith Heintze (hrsg.), Gargantua und Pantagruel, Erster Band, Frankfurt a. M..

- Jens (2001): Jens, Walter (hrsg.), Kindlers neues Literaturlexikon, 21 Bde, München.

- Saage, Richard (2009): Utopische Profile, Bd. 1, Renaissance und Reformation, 2. korrigierte Aufl., Mün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