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3)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4. 10. 13. 09:15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사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원: 텔렘 사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법과 변호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정치가도, 설교자도 전혀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화폐가 유통되지 않으므로, 고리대금업자가 주위의 사람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종교가 필요 없으니, 교회도 수사직도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텔렘 사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법적 규정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의미 있게 그리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부 사회로부터 전해지는 도덕적 강요를 수용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원천적으로 정직하고 고결한 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녀 사이의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등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는 남자는 12세에서 18세, 여자는 10세에서 15세로 제한하고, 이곳의 수도사는 언제든지 자유의사에 의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텔렘 사원에서의 삶을 자기 수련을 위한 자발적인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 귀족과 같은 풍요로운 삶: 텔렘 사원은 마치 프랑스의 “투렌 성Château Touraine”처럼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비교적 값비싼 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성주는 수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이 사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유토피아의 경우와는 달리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생활합니다. 여성들이 여가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사원 밖에는 체조 실, 승마장 그리고 극장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수영장도 비치되어 있고, 3층 건물의 욕실도 있습니다.

 

강가에는 멋진 정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한 가운데에는 미로처럼 만들어진 길이 닦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산책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거대한 첨탑 사이에는 무도회를 개최할 수 있는 홀이 있습니다. 사원은 프랑스의 어떠한 왕궁보다 더 멋지고 휘황찬란합니다. 텔렘 사원에는 도합 9332개의 공간이 있는데, 매 공간마다 침실, 거실 그리고 옷장이 달려 있습니다. 이 공간들을 나서면 복도가 있는데, 이 복도는 음악실, 교회당으로 활용되는 거대한 홀로 향하고 있습니다.

 

18. 노예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텔렘 사원: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다수의 일반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동에 의해서 실현가능합니다. 텔렘 사원 내에서 편안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예 노동에 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잘 교육 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노래 부르고 악기를 하나씩 연주할 줄도 압니다. 문제는 텔렘 사원에서의 모든 삶이 주위에 살고 있는 많은 하인들의 도움에 의해서 영위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Rabelais: 175). 이 점을 고려한다면, 라블레의 유토피아는 엄밀히 말해 고대의 노예 경제의 구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많은 하인들과 수공업자들을 거느립니다. 여성의 홀에서는 수많은 하인들이 서서 여성들을 치장하고 향수를 뿌리고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합니다. 남성들 역시 하인들의 도움으로 멋진 옷을 입고, 자신을 치장합니다. 텔렘 사원으로부터 가까운 숲속에는 거대한 건물이 위치하는데, 이곳에서는 농부, 양치기, 정원사들이 오곡백과의 결실을 거두고 여러 가지 종류의 육류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금 세공업자, 보석 가공업자, 베 짜는 사람들, 재단사, 양탄자 제조업자 등이 살면서, 제각기 자신의 수공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텔렘 사원에서 살아가는 고결한 남녀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자신이 맡은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19. 학문과 교육 그리고 취미 활동: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마치 나중에 제후 내지는 고위 신하로 활약하려는 듯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교육을 받습니다. 한 사내는 고결한 유희에 익숙해 있으며, 승마, 달리기, 수영, 레슬링 등을 연마합니다. 그는 놀라운 춤 솜씨를 자랑하는 댄서이며, 고풍스러운 승마를 즐기기도 합니다. 사내는 여러 가지의 외국어에 능숙하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이렇듯 대부분 사람들은 걱정 없는 환경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학문과 스스로 원하는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텔렘 사원의 사람들이 고위층의 교양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학문과 운동에 몰두하며, 동시에 생업을 위한 노동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제각기 하인들이 달려있어서 의식주 문제에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20.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 fay ce que vouldras” 자유의 유토피아: 찬란하고 풍요로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라블레의 텔렘 사원에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루함이 자리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권태와 따분함은 텔렘 수도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행하라!”라는 원칙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텔렘 사원에서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세 가지 고통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첫째의 고통은 “가난”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가난이 없으니, 과도하게 지속적으로 노동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걱정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인간 삶에 있어서의 두 번째의 고통은 “복종”입니다. 인간은 주어진 관습과 도덕 그리고 실정법의 노예로 자발적으로 복종합니다. 특히 사람들은 중세의 시기 동안에 신앙으로 인해서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종교는 때로는 인간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지만, 중세 시대에는 복종을 심화시키는 매개체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왕은 왕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현세에서 불안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텔렘 사원의 사람들은 이러한 법과 도덕 그리고 관습에 종속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인 작가 라블레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21.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 그러나 방종으로 치닫지는 말라.: 인간 삶에 있어서의 세 번째 고통은 “순결”입니다. 여기서 순결함은 성의 순결을 지칭합니다. 자고로 순결과 정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의 미덕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정반대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금욕이 지금까지 미덕으로 이해되었다면, 성을 즐기고 향유하는 것은 과연 악덕이란 말인가?” 현대인이라면 이러한 물음에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시는 르네상스 시기였습니다. 자유로운 향유의 삶은 주어진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생활방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성은 한편으로는 종족 번식과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향유와 쾌락과 관련됩니다. (Berneri: 133).

 

라블레에 의하면 지금까지 서양의 역사에서 인간의 성적 본능을 죄악으로 단정하고 이를 금기한 사상가 그리고 종교인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임 없이 살아가는 솔로들에게 누군가가 “방종하게 살지 말고 순결과 지조를 지켜라.”고 말한다면, 이는 부자유의 질곡 속에서 살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라블레는 이 대목에서 어떠한 유형이든 간에 인간이라면 자신의 고유한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라블레는 가르강튀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임을 쟁취하라. 그 다음에 임에게 사랑을 베풀라. 설령 그것이 주어진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의 범위에서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라고 말입니다.

 

22. “反-사원”으로서의 텔렘 사원: 아이러니하게도 “가난, 순결, 복종”은 수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신품성사에서 맹약하는 내용입니다. 라블레는 인간 삶에서 가난, 순결, 복종을 떨쳐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라블레의 자유주의의 사상이 로마 가톨릭 계명과는 정반대되는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텔렘 사원의 생활관습은 로마 가톨릭의 규율과는 현격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가령 텔렘 사원은 다른 사원과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그 하나는 성벽이 없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신 앞에서의 신품성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Köhler: 106). 텔렘 사원은 외부 인의 출입을 통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갇혀 있는 공간이 아니며, 가톨릭의 종교적 계율을 추종하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텔렘 사원은 “반-사원”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텔렘 사원은 사원이라기보다는, 별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곳의 고결한 남녀들은 명예롭게 사랑하고, 부자로 살아가며, 자유로움을 실천하며 생활하겠노라고 약속합니다. 텔렘은 그리스어로 “의지 내지 갈망 θελημα”을 뜻합니다. 이는 주어진 계명 그리고 시간과 무관하게, 아니, 주어진 계명 내지 시간에 역행하며 살아가겠노라는 인간의 강력한 의지 내지 갈망을 가리킵니다. 모어의 유토피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는 반면에, 레블레의 사원 사람들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