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2)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4. 10. 12. 09:24

(앞에서 계속됩니다.)

 

8. 『팡타그뤼엘 그리고 가르강튀아』, 라블레의 대작: 작품 『팡타그뤼엘 그리고 가르강튀아』는 라블레의 대표작으로서 도합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의 작품은 『디프소텐 왕, 위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아들인 유명한 팡타그뤼엘의 끔찍한 전율을 일으키는 모험과 영웅적 행위』라는 긴 제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편의상 제 1권을 『팡타그뤼엘』, 제 2권을 『가르강튀아』라고 명명하곤 합니다. 제 3권부터 5권까지는 “팡타그뤼엘 제 3서”, “팡타그뤼엘 제 4서”, “팡타그뤼엘 제 5서”라고 칭해지고 있습니다. 다섯 권의 책은 1532년, 1534년, 1545년, 1552년 그리고 1564년에 차례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마지막의 책은 라블레가 사망한 다음에 발표된 것입니다.

 

책의 제목에는 “알코프리바스 나시어 선사에 의해서 새롭게 편찬되었다.”라는 부연설명이 첨부되어 있는데, “알코프리바스 나시어 Alcofrybas Nasier”라는 이름은 작가 자신의 이름, “프랑스와 라블레 François Rabelais”의 음절이 즉흥적으로 뒤바뀐 표현입니다. 그밖에 “팡타그뤼엘”이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식욕”을 뜻하는 “pantagruélique”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며, “가르강튀아”라는 이름은 “멋진 식사”와 관련되는 “gargantuesque”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Jens 14: 859). 사실 팡타그뤼엘주의는 “평화로이, 즐겁고 건강하게, 언제나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 (vivre en paix, joie, santé, faisant toujours grande chère)”이라고 정의를 내려지고 있습니다. (유석호: 89). 이를 고려한다면 작가는 인간의 욕망의 근원을 일단 “식욕”으로 규정하고, 그 다음에 “성욕”과 “명예욕”을 설정한 게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블레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인간의 근원적 행복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고찰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9. 오부작의 간략한 줄거리 (1): 라블레의 소설은 루키아노스Lukian의 가상적인 거짓 이야기를 유추하게 합니다. 온갖 상상 속의 이야기를 동원하여 독자를 미소 짓게 만드는가 하면, 부자유의 사회에 대한 쓰라린 독설을 마구잡이로 쏟아 붓기도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라블레의 작품은 마치 목욕탕의 물처럼 독자들의 몸에다 온갖 유머러스한 따뜻한 물, 온갖 시니컬한 찬 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Jens 14: 860). 그렇기에 작품이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감정의 온탕, 풍자의 냉탕”으로 평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제 1권에서 팡타그뤼엘은 자신의 몸의 크기를 마구잡이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나중에 영국의 소설가, 조나탄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이러한 방식의 상을 도입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독자는 소설 속의 모든 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팡타그뤼엘은 기상천외한 거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는 보통 사람의 크기로 변신하여 어느 법정에 참석하여 재판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금 엄청난 거인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서술자는 놀랍게도 팡타그뤼엘의 입속에서 약 6개월을 살면서 마치 암벽과 같은 이빨 위에서 생활하는 기이한 사람들과 조우하기도 합니다. 제 2권은 팡타그뤼엘의 아버지 가르강튀아가 경험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서양 철학에 관한 기발한 비유가 등장하는가 하면, 말미에 우리가 다루게 될 텔렘 사원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10. 오부작의 간략한 줄거리 (2): 제 3권은 다시 팡타그뤼엘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친구, 파누르지를 만납니다. 파누르지는 결혼이 과연 어떠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지, 혼인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깊이 고심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결혼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묘책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팡타그뤼엘과 그의 친구는 범선을 타고 신의 물병을 찾아 나섭니다. 신탁에 의하면 신의 물병은 결혼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분명히 전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의 물병”은 중세 문학에서 자주 나타나던 “성배”와 “비너스의 산”에 관한 비밀과 관련됩니다. 성배와 비너스의 산은 인간 삶의 완전한 행복을 기약해주는 상징적 대상입니다. 그것들은 축복받은 삶과 환희와 기쁨의 에로스와 관련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성배와 비너스의 산은 중세 이후의 기사 문학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객관적 상관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 4권은 범선 여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의 물병을 찾는 두 사람의 여정은 오래 이어집니다. 이 와중에서 팡타그뤼엘과 파르누지는 기이한 사람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제 5권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신의 물병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의 물병은 인간의 궁극적 행복, 평화로운 축복의 삶 그리고 사랑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비너스 산에서의 쾌락과 관련됩니다. 소르본 대학의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작품에 실린 수많은 패러디와 성서의 인용 등을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라블레의 작품은 오랫동안 신성모독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11. 오부작의 주제 (1): 라블레는 5부작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유머와 해학이 인간의 심리에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를 공급하는가? 하는 사항을 알려줍니다. 의사, 신학자 그리고 작가로 살아간 저자는 네 가지 사항을 문학적 주제로 설정하였습니다. 첫째로 작품은 당시 스콜라 학자들의 편협한 시각과 현학주의를 예리하게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초기에 스콜라 학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멸시하고, 자신의 학문이 세상의 모든 사안을 포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라블레에 의하면 냉엄한 학문이 아니라, 현세의 행복을 만끽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라블레는 감각과 현세를 적대시하거나 등한시하는 가톨릭 수사들의 자세를 야유하려 하였습니다. 수사들은 변화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 인간의 오관 등의 영향력을 처음부터 경시하고 있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 중요한 태도이지만, 때로는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찰하는 일을 둔감하게 만듭니다.

 

12. 오부작의 주제 (2): 셋째로 라블레의 작품은 당시의 교육방식이 허례 허식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당시의 교육은 주어진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적 훈육 내지는 시대착오적 경구만을 강조했습니다. 종교적 훈육은 피교육자를 무의식적으로 계층 사회 내의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고유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위로부터 아래로 하달되는 교육 정책과 교육 방식은 일방적이고 편협하다고 합니다. 넷째로 라블레는 무조건 상대방을 윽박지르며,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인간형을 비난하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일부 유럽인들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재화를 갈취하곤 했는데, 작품은 이러한 제국주의의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로써 라블레의 평화주의적인 지조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주제는 유머와 사타이어, 언어유희 그리고 인용의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라블레만큼 고대의 루키아노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구성해낸 작가는 르네상스 시대에는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3. 엘리트들을 위한 새로운 유토피아: 이제 라블레가 다루고 있는 텔렘 사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제 2권에서 가르강튀아는 요한 수사에게 무언가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피크로클로스라는 왕은 전쟁욕구에 광분하여 인접 국가를 무력으로 집어삼키려고 했는데, 요한 수사가 사람들을 이끌고 피크로클로스 왕의 공격을 방어했던 것입니다. 가르강튀아는 요한 수사의 방어적 대응을 높이 평가합니다. 요한 수사는 한마디로 용맹스럽고, 기골이 장대하며, 활발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르강튀아는 요한 수사에게 텔렘 사원을 선물로 바칩니다.

 

텔렘 사원은 어떤 이상적인 왕궁, 이상적인 대학, 혹은 이상적인 시골 별장 등과 같은 건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르네상스의 새로운 관료주의의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텔렘 사원은 권력과 경제적 풍요로움에 근거한 공간이 아니라, 지식과 지적 능력에 바탕을 둔 이상적인 공간으로 이해됩니다. 라블레는 이곳에서 거주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지적으로 탁월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고결한 심성을 지닌 자들이라는 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14. 텔렘 사원의 기하학적 구도와 비-국가주의: 텔렘 사원은 르와르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기하학적 구도로 축조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육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서리마다 둥근 탑 여섯 개가 우뚝 서 있습니다. 모든 대문은 동일한 크기의 똑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탑과 탑 사이에는 약 312걸음의 거리가 유지되는데, 텔렘 사원의 건물들은 모두 6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Saage: 213). 이를 고려한다면 사원은 “비-국가주의적인” 틀을 위한 오래된 대안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르네상스의 유토피아는 국가라는 엄격한 기관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개별적 인간의 제반 삶에 관해서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로 우리는 모어의 『유토피아』,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안드레애의 『기독교 도시 국가』를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건축과 외형을 고려한다면, 텔렘 사원은 장소 유토피아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 다른 전통적 유토피아는 국가의 철저한 규칙과 권위에 의존하지 않습니까? 이에 반해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비-국가주의적인 유토피아의 요소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15. 비-국가주의의 생활방식은 아나키즘의 삶의 방식이다: 외부적 강요로부터 해방된 개인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강제적 법 규정들 그리고 외부의 인습에 근거한 전통적 관습들이 깡그리 사라져야 합니다. (Rabelais 177). 실제로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위로부터의 모든 규범을 철폐하고 반-국가주의, 다시 말해서 아나키즘의 틀을 개방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일련의 유토피아는 대체로 반-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엄격한 국가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세부적인 법 규정을 설정함으로써, 가령 개별 인간의 세부적 시간까지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텔렘 사원의 법 규정은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라는 단 하나의 규칙으로 축소화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발적으로 먹고 마시며, 일하거나 잠을 잡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제도적인 강제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텔렘 사원에서는 심지어 시계 내지 태양 시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의해 종속되거나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텔렘 사원은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입니다. 텔렘 사원에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은 무엇보다도 미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