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1)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4. 10. 12. 09:16

이 글은 필자의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2권, 캄파넬라에서 디드로까지" (울력 202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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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발성에 근거한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 프랑스와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연작 장편 소설,『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르네상스의 이상을 고려할 때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명작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하는 것은 『가르강튀아』의 제 2권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상적 공동체로서의 텔렘 사원입니다. 텔렘 사원은 르네상스 유토피아의 카테고리에 편입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구성적이고 체계적인 국가 내지는 이상적 공동체의 국가 모델과는 현격한 거리감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534년 이후에 간행된 라블레의 『팡타그뤼엘』,『가르강튀아』는 거대한 인간의 역정을 다룬 교양소설에 편입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국가주의에 근거한 자발성의 유토피아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Köhler: 107). 물론 이러한 상은 엘리트 중심의 공동체, 나중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구상한 바 있는 솔로몬의 사원처럼 하나의 독자적인 건축물로 축조되어 있습니다.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더 나은 국가에 관한 유토피아 모델이 아니라, 자발적인 삶을 추구하는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의 특징을 드러내는 문학적 범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유토피아의 요소: 그럼에도 우리는 라블레의 작품에서 토머스 모어의 영향을 생략할 수 없습니다. 작품에는 『유토피아』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라블레의 작품 속에는 플라톤의 『국가』, 갈레노스, 고대 신화 그리고 민담 등 수많은 문장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가령 거인 팡타그뤼엘의 어머니, 바데벡은 아마우로트 부족 출신인데, 이 부족은 놀랍게도 『유토피아』의 수도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지칭합니다. 그밖에 가르강튀아는 아들, 팡타그뤼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 즉 발신 장소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유토피아”라고 명명합니다.

 

그밖에 우리는 제 2권, 『가르강튀아』에 등장하는 텔렘 사원의 사람들의 슬로건인 “그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라는 규정에 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텔렘 사원의 규정은 르네상스의 유토피아가 지닌 자유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표방하고 있습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라블레의 장편의 방대한 내용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대신에, 작품의 일부에 해당하는 텔렘 사원에 우리 논의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3. 르네상스의 인간형, 개인 주체로서의 지식인: 라블레는 자신이 르네상스 시대의 유형적인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문학과 철학 뿐 아니라, 의학과 법학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백과사전 방식의 방대한 지식을 섭렵했다는 사실 또한 르네상스의 대부분 지식인들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라블레는 특히 고대 그리스 문학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숭배하였습니다. 라블레는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스콜라 학문을 몹시 고리타분하게 생각했으며, 사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사들의 외롭고 명상적인 생활을 혐오했습니다. 자유와 아름다움을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그는 르네상스 시대정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전형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르네상스는 개혁 운동이 순식간에 출현한 시대라기보다는 개인의 주체의 중요성을 서서히 인지하던 시대였습니다. 수많은 휴머니스트들이 하필이면 이탈리아에서 속출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에 온존했던 자유의 분위기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지지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스트들은 직접적으로 인본주의를 설파한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 내지는 개인 존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예술적 장르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체제 내지는 교회 체제의 권위를 처음부터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와 예술의 고유한 권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거나 권력이 배제된 대중의 권한을 완강하게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4. 라블레의 삶, (1) 휴머니스트: 라블레는 시대를 뛰어넘는 문헌학자이며, 자유 사상가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가톨릭주의자 그리고 신교도로부터 공동으로 신랄한 비판을 당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블레는 종교 내부의 사고 내지 세계관이 아니라, 종교의 부자유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휴머니즘 사상을 설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블레의 유년과 청년기의 삶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그는 1483년 프랑스의 시농 근처의 영지에서 대지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로 활동하는 분이었습니다. 라블레는 이른 나이에 근처의 베네딕트 수도원 학교에서 다녔으며, 1510년 보메 근처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련수사로 등록하였습니다. 약 10년 후에 그는 둘째 형님과 함께 퐁트네 르 콩트에 있는 수도원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이탈리아의 휴머니즘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겠다고 결심합니다. 라블레는 독학하여 1522년에는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 이야기를 라틴어로 번역할 정도로 놀라운 고대 그리스어의 실력을 쌓았습니다.

 

5. 라블레의 삶, (2) 문헌학자: 라블레는 종교의 갈등이 일파만파로 번지던 격동기에 살았습니다. 라블레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1523년에는 파리의 소르본 신학대학은 그리스어 연구를 아예 이단의 행위로 규정하였습니다. 라블레 역시 자신이 소장한 그리스어 책들을 강제로 빼앗기고 맙니다. 특히 프란체스코 종파는 이단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고대 학문의 연구를 처음부터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라블레는 자신이 속해 있는 프란체스코 교단 본부에다 베네딕트 교단으로 적을 옮기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것은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청원은 수용되었고, 라블레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그리스 문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간간이 라블레는 서기를 동행하여 프랑스 이곳저곳을 여행했는데, 이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그는 틈틈이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6. 라블레의 삶, (3) 출판업자 소설가: 라블레는 문학작품 외에도 문헌학자로서의 능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1526년 그가 편집한 첫 번째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그것은 라틴어 경구 모음집이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간행한 것이었습니다. 1528년 라블레는 보르도, 오를레앙에 머물면서 공부에 열중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특정 대학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며 “세계시민”으로서의 지조를 잃지 않았습니다. (Heintze: 24). 이 시기에 그는 어느 과부와 동거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과 딸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1530년 라블레는 몽페이에 대학에서 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의학을 선택한 데에는 한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의학생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리스 원전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블레는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갈레노스의 그리스 원전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후 뒤늦게 바칼로레아 학위를 취득합니다. 1532년 여름 리옹에서 의사 출판업자 그리고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책을 간행하기 시작합니다. 『팡타그뤼엘』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원래 이 책은 기사소설로 완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작가 미상의 민중서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7. 라블레의 삶, (4) 정치가 그리고 의사: 1534년에 그는 리옹에서 추기경 장 뒤벨레를 알게 됩니다. 이때 라블레는 그의 주치의로서 로마 여행에 동행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1535년 여름 인문서 연감을 간행한 다음에 라블레가 리옹에서 잠적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리옹의 정치가들은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위그노 그리고 이들의 친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단자로 몰려 처형당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라블레는 장 뒤벨레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뒤벨레가 다시금 그를 데리고 로마로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537년 초부터 라블레는 교황 파울 3세의 주치의로 몽펠리에에 체류합니다. 이곳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에 관해서 강연합니다. 이때 그는 고대 그리스 원전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라틴어 번역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해 여름에 라블레는 리옹에서 직접 시체를 해부하였는데, 이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체의 해부는 가톨릭 신앙의 교리에 의해서 오랫동안 금기로 간주되었습니다. 1538년 프랑스와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와 휴전협정을 맺었는데, 이에 일조한 사람이 바로 라블레의 친구 장 뒤벨레였습니다. 1553년 그의 책들이 출판금지 조처를 당하자, 라블레는 공인으로서의 모든 수입금을 포기하고, 다시 잠행을 떠납니다. 이후 그는 오로지 소설 집필에 몰두하다가 조용히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