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1) 신화와 유토피아, 일치성과 불일치성

필자 (匹子) 2024. 10. 5. 11:14

이 글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울력 2019) 제 1권에 실려 있습니다. 많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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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유토피아의 두 가지 방향 (1): 신화와 유토피아 사이의 관련성은 아직도 학문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서양의 신화가 과연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유토피아와 상관관계를 지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고대의 유토피아를 구명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방향이 채택되었습니다. 첫째로 유토피아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많은 부분에 있어 플라톤의 『국가』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고대의 많은 범례에서 “국가주의의 유토피아archistische Utopie”의 틀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이는 더 나은 삶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어떤 바람직한 국가의 시스템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관점입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의 근원적 모델은 플라톤의 『국가』가 아니라,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어지는 장에서 세부적으로 언급되겠지만, 플라톤의 작품 속에 계층주의 내지 관료주의의 특성 그리고 결정론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대 유토피아의 두 가지 방향 (2): 둘째로 고대의 갈망의 상의 수많은 범례와 유토피아의 기능은 플라톤의 『국가』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고대의 신화 속에서 상당 부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황금의 시대에 관한 고대인들의 갈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인들의 그러한 갈망이 주로 가난한 천민들에 의해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블로흐: 958). 고대의 특권층은 대부분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굳이 “놀고먹는 나라Schlaraffenland”와 같은 황금의 시대의 상에 관해서 꿈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서 황금의 시대에 관한 일반 사람들의 갈망을 부분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황금의 시대를 꿈꾸는 자들은 대부분 당대의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글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어째서 가난과 착취가 없는 세계를 그리는 문헌이 고대 사회에 많이 발견되지 않는가? 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놀고먹는 나라”에 관한 전설은 다양한 형태와 내용으로 구전되어왔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한스 작스의 작품 속에 처음 기록의 형태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놀고먹는 나라”는 “게으른 원숭이의 나라”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3. 신화와 유토피아 사이의 관련성: 신화와 유토피아 사이의 기능을 추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물음에 봉착합니다. 즉 “신화에 반영된 유토피아의 상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유토피아 연구에서 어떠한 척도로 규정될 수 있는가?”하는 물음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화와 유토피아의 사고가 서로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화와 유토피아를 구분하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우리는 분명 시간이라는 전제조건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서양의 신화는 주로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 태동한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토피아라는 것을 더 나은 삶에 관한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꿈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꿈은 특정 인간이 처해 있는 구체적 현실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꿈으로서 유토피아는, 나중에라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될 가능성이 충분히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 속에 도사린 실현의 가능성이 나중에 실패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결과론적으로만 추적하여 유토피아가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신화는 다른 특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물론 신화 속에도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 도사린 것은 사실이고 이 점에 있어 신화가 부분적으로 유토피아의 요소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는 다른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토피아와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특성을 보입니다. 이 장에서 신화와 황금의 시대를 추적하는 동안 필자의 일차적 관심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화 속에 담겨 있는, 유토피아와는 다른 신화만의 고유한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4. 황금의 시대, 태고에 관한 찬란한 상: 고대 사람들 역시 더 나은 세상에 관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동양의 대동(大同)에 관한 사고와 무릉도원의 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진정염: 124). 서양의 경우에는 황금의 시대, 아틀란티스 그리고 성서의 에덴동산 등에 관한 신화를 범례로 채택해볼 수 있습니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00년경에 황금의 시대에 관한 신화를 언급했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가장 오래된 상으로서 고대의 문학 작품에 자주 언급됩니다. 우리가 중시해야 할 사항은 신화와 전설 속에 도사린 고대인들의 갈망을 일차적으로 이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황금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는 기원전 3세기에 활약한 고대 작가, 솔로이 출신의 아라토스Aratus가 지은 교훈시 『천체의 형상Phainomena』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사상을 연구했으나, 물리학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아라토스는 크니도스 출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에우독소스Eudoxos의 천문학 이론에서 어떤 힌트를 찾아낸 바 있습니다. (Erren: 36). 플라톤 역시 황금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들의 다양한 버전을 알고 있었으며, 로마 시대의 오비디우스 또한 걱정 없는 삶을 가능하게 했던 태고 시절의 찬란한 삶을 자신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에서 시적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 제1권에서 황금의 시대가 은의 시대 그리고 청동의 시대를 거쳐 철의 시대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비드: 25). 그밖에 찬란한 삶에 관한 전설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성서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인간은 아무런 노력과 수고 없이 얼마든지 지상의 열매를 따먹고 살아갑니다.

 

5. 죽음 이후의 상과 종교의 탄생: 인간은 누구든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갈구하며 이러한 삶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그리하여 출현한 것이 바로 죽음 이후의 세계 그리고 영생에 대한 갈망의 상입니다. 광대무변한 자연과 변화불측한 기후에 직면하여 거대한 두려움을 느꼈던 원시인들은, 어떤 믿음을 통해 그들의 근심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달래보려 하였습니다. 종교의 탄생 또한 바로 이러한 불안을 극복하고 영원히 편안하게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갈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에 대한 갈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삶을 꿈꾸게 했으며, 이로 인하여 종교가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로서는 기원전 2700년경에 나타난 길가메시Gilgamesh의 서사시를 들 수 있습니다. 수메르 왕국의 실존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는 길가메시는 서사시) 이전에는 지하 세계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김유동: 239 이하). 고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과 같은 태고의 문명은 영원한 삶을 갈구하는 믿음과 종교 없이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신, 죽음 그리고 신앙 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찬란한 삶에 대한 기억은 태고 시절의 삶으로 떠올랐으며, 찬란한 삶에 대한 기대감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