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2) 신화와 유토피아. 일치성과 불일치성

필자 (匹子) 2024. 10. 5. 11:20

(앞에서 이어집니다.)

 

6. 축복의 섬에 관한 문헌들: 고대 문학에서는 황금의 시대에 관한 찬란한 상으로서 어떤 축복의 섬이 종종 형상화되었습니다. 호메로스 또한 기이한 섬을 묘사한 바 있는데 요정 키르케가 머무르는 아이올리아 섬과 외눈박이 거인이 사는 섬 그리고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는 연꽃 섬 등이 그의 『오디세이아』에 차례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축복의 섬이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활동했던 사모사타 출신의 루키아노스의 『참된 이야기Ἀληθή διηγήματα』를 통해서입니다. (Jens L: 680f.). 루키아노스에 따르면 축복의 섬은 대서양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육체 없는 에테르와 같은 존재들이 살고 있습니다. 수도의 물품들은 온통 금과 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의 벽에는 온갖 보석들이 박힌 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밀이 자라는 들판에서는 저절로 완성된 빵이 튕겨져 나오며 우유와 치즈가 풍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밖에도 그는 디오니소스 섬을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디오니소스 섬은 포도나무로 뒤덮여 있는데, 그곳 개울에서는 언제나 사향포도주가 흐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섬이라는 장소가 고대 문학에서 항상 축복의 공간으로만 묘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망망대해 속의 어떤 섬을 악덕과 적개심, 폭력과 투기 내지는 질투가 자리하는 공간으로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인공 아이네이스는 지하 명부의 하데스 세계, 영웅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향을 차례대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 35 이하). 축복의 섬에 관한 상은 고대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가령 16세기 프랑스에서는 『파뉘르주의 항해Les Navigantion de Parnurge』라는 작자 미상의 작품이 발표된 바 있는데, 여기에도 “풍요와 행복의 섬des isles fortunées & heureuses”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유석호: 106).

 

7. 아틀란티스에 관한 전설: 솔론 그리고 밀레토스 출신의 디오니시우스는 이상적인 사회에 관한 가장 막강한 원형으로서 아틀란티스를 서술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이에 관해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약 9000년 전, 아테네와 아틀란티스 왕국 사이에 거대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틀란티스 왕국은 지브롤터 해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약 5800 평방 마일의 거대한 섬이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권력의 제국을 형성한 아틀란티스는 심지어 이집트와 그리스를 위협할 정도였는데, 거대한 지진으로 인하여 섬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섬의 수도, 아틀란티스는 거대한 곡식 창고와 막강한 병기고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출현한 문학 작품들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아틀란티스의 학자들은 인위적으로 음식과 음료수를 생산해냈다고 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자신의 텔레파시를 활용하여 찬란한 황금의 시대를 떠올리면서 모든 재화와 곡물을 풍요롭게 마련하였습니다.

 

가라앉은 섬이나 가라앉은 대륙에 관한 신화는 놀라울 만큼 오랫동안 전해져왔으며, 유토피아의 이상 국가에 대한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를 집필할 때 언제나 오래 전 대서양에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를 표상했습니다. 이상도시는 8각형으로 이루어진 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르네상스시기에 밀라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는 이러한 이상도시를 구상한 바 있습니다. 이상도시는 정팔각형의 도시의 모습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스포르차가 구상한 이상도시는 한 번도 축조되지 않았는데, 이탈리아의 동북부의 도시 팔마노바는 이러한 구조를 어느 정도 답습하고 있습니다. (Krüger: 41). 단테는 인간 동물에게는 전제군주제가 최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요약하건대 8각형의 이상도시는 전제 군주제를 전제로 한 계층 사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상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8. 주어진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가상적인 상: 인간은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그것이 보물인가, 사랑인가 하는 물음은 부차적 의미를 지닙니다. 찬란한 장소에 대한 인간의 꿈 역시 당사자가 처한 처지가 힘들고 각박하기 때문에 뇌리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유토피아의 상 배후에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온존하는 나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축복의 섬이나 아틀란티스와 같은 이야기들 그리고 신화 등을 주어진 현실적 정황으로부터 격리하여 독자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설과 신화의 내용은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진 현실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신화들과 전설들을 그 자체 폐쇄적으로 고립시켜 개별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출현한 현실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것들을 추적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신화와 전설의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신화 내지 전설이 출현하게 된 배경으로서 주어진 구체적 현실에 대한 조건을 알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령 문헌이 보존되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도 우리는 신화적 내용이 어떤 바탕 하에서 출현하였으며, 무엇을 위해 등장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기껏해야 부분적인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9. 유토피아와 신화 사이의 차이점 (1): 이제 유토피아와 신화의 차이점 세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신화가 지니는 숙명론적 특징 그리고 유토피아가 지니는 변화 가능성의 특징의 차이입니다). 가령 토머스 모어 이후에 묘사된 사회 유토피아에는 황금의 시대의 상 내지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을 만끽하는 천국의 상이 도입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만 다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헤시오도스는 인간의 몰락에 관한 핵심적 모티프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황금의 시대 다음으로, 은의 시대 그리고 철의 시대가 이어지며, 네 번째, 다섯 번째의 시대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인류는 철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인간은 낮 동안에는 결코 힘든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Hesiod: 82). 헤시오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고려하면서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했으나, 여기서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신화적 역사적 유형의 파멸 이론입니다.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태초에 찬란한 삶이 존재했으며, 역사가 진척되는 동안 인류의 삶은 파멸을 향하여 나락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10. 근원적 의미로서의 유토피아: 신화적 역사적 유형의 파멸 이론을 내세운 사람 가운데 우리는 헝가리 출신의 신화 연구가 카를 케레니Karl Kerényi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케레니는 고대 그리스의 유토피아를 “근원적 의미”라고 명명합니다. 역사란 케레니에 의하면 이러한 근원적 의미가 불법적으로 파괴되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 의미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갈망을 무제한적으로 성취하려고 하는 무엇입니다. 이러한 근원적 의미를 인간이 억지로 역사 속에서 성취하려고 하니, 역사의 전개가 보다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진보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공상주의Utopismos”라는 조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Kerényi: 17). 케레니는 쇼펜하우어, 바흐오펜 그리고 니체의 시민주의 역사 이론을 탐구하면서, 역사 발전은 진보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황금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끝없이 추락해간다는 것을 확인해냈습니다. 그의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 정당한 논거를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케레니의 신화 연구가 마르크스주의 신화 연구가인 조지 D. 톰슨George D. Thomson의 그것과는 반대로 “찬란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인간의 갈망”을 반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