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3) 블로흐의 물질 이론

필자 (匹子) 2024. 9. 11. 09:33

(앞에서 계속됩니다.)

 

11. 물질과 인간은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변증법적 일원성으로 이해된다. 물질의 개념은 한마디로 “아직 아닌 존재의 존재론”의 핵심 사항입니다. 아직 아닌 것은 한편으로는 가능한 무엇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예측된 상Vor-Schein”으로서의 출발점 내지는 이전 형태로 주어져 있는 무엇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아직 아님이라는 지평은 암시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직 아님의 핵 그리고 그 주위에 가득 찬 무엇은 세계의 과정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의 실체가 바로 포괄적 의미에서 물질이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란 자연의 소재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프레임, 즉 주어진 현실의 틀을 가리킵니다.

 

물질은 무언가를 법적으로 밝혀내려는 과정 내지는 소송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방향으로 향해서 의식으로 행동해나갑니다.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세계의 (물질적 일원성으로서의) 물질성이라는 자연 과학적 전제 조건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은 이원론으로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변증법적인 일원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의식된 주체의 발전이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무기질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세계는 물질의 저장 그리고 축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그러한 상태로 거의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물질 속에서도 무언가를 추동하는 동인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도록 자극하는 게 바로 이러한 동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인은 마치 하나의 싹과 같은 주관적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으로 인하여 의식하는 인간 주체 역시 자신의 가장 놀라운 모습을 완성해낼 수 있습니다. 의식 그리고 정신은 제각기 물질적 존재의 추동하는 힘을 통해서 스스로 성찰해나갑니다.

 

12. 물질에 기초하는 무엇으로서의 실체: 모든 현존재에는 물질적인 무엇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물질은 “두 손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무엇” 내지는 “중량감을 지닌 무엇”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Traub: 278). 블로흐는 주어진 세계를 그 자체 해명해주는 것이 바로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Bloch, SO: 107). 이는 모든 물질 이론의 근거가 되는 주장인데, 이것이 바로 블로흐의 철학적 존재론입니다. 물질의 상부에는 어떠한 창조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정신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소재와 정신이라는 이원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의식이 소재와 물질에서 발전되었다는 사고는 무척 해명하기 힘든 난제입니다.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내부적으로 고찰할 때 무기물, 유기물 그리고 의식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련성을 고려하면서 블로흐는 인간적 사회적 물질의 물리학적 조직적 토대에 관해 논평합니다. 그렇지만 블로흐의 물질의 개념은 기계적 물질 이론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포괄적인 무엇인데, 그 자체 하나의 일원적인 특성을 표방합니다. 세상을 규정하는 것은 어떤 유일한 물질이며, 하나의 물질 원칙이라고 합니다. 물질에 기초하는 무엇은 기체 (基体, Substrat)라는 개념으로 통용되었는데, 블로흐는 어떤 무엇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실체 Substanz”라는 개념으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실체는 근본적으로 현존하는 무엇으로 파악됩니다. 다시 말해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기체”로 이해되었지만, 블로흐가 실체의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까닭은 블로흐가 변모, 다시 말해 존재의 변증법 변화의 특성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Bloch, SO: 438).

 

13. 물질 자체 속에 에너지 출현을 촉구하는 움직임의 능력이 자리하고 있다. 물질은 두 가지 사항으로 구분되는데, 이것들은 존재와 의식을 가리킵니다. 블로흐는 “에너지의 출현으로서의 운동은 물질이 지닌 현존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합니다. (Boch, MA: 192). 움직임 그리고 형태를 만들어내는 일은 역동적 특성 그리고 논리적 특성에 해당하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이야 말로 물질이 외부 세계에 확정된 무엇을 산출해내는 두 가지 기본적 특징이라고 합니다. (Bloch, PA: 160). 블로흐는 물질이 수행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운동, 즉 움직임은 물질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인데, 역으로 표현하자면 운동이 수행하는 내용이 바로 물질이라고 합니다. (Bloch, LdM: 123).

 

블로흐는 물질에 관한 전통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물질 자체 속에 에너지 출현을 촉구하는 움직임의 능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견해 말입니다. 여기서 블로흐가 말하는 운동 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태 원칙과는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물질은 당김과 밀침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항상 동일하게 머무는, 죽어 있는 고체 덩어리 내지는 나무토막이 아니다. 물질은 설령 움직임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그 방식에 있어서 어떤 양적 특성을 지닌 채 이전처럼 다시 모든 형태 근처로 잠입하곤 한다.” (Bloch, TE: 230). 블로흐는 기계적인 고전 물리학이 물질을 마치 나무토막처럼 이해하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물질은 –물리역학이 주장하는- 죽어 있는 나무토막과 같은 무엇이 아니라, 블로흐에 의하면 생동하는 존재로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질은 그 자체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개방된 가능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의) 수동적인 왁스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형태를 산출하며 스스로를 형성시키기 위해서 유동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는 정신이 유일한 으뜸 패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질은 여기서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나무토막으로서 천편일률적으로 생각되는 방식으로 완화될 수는 없다. 왜냐면 물질은 자신의 찬란한 꽃을 피울 때 결코 실체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실체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게 때문이다.(Bloch, TE: 234).

 

14. 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 속에 도사린 이중적 특징: 블로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도입하면서 물질에 관한 근본적 요소를 새롭게 찾아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형태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소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질의 첫 번째 특징에 해당하는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 κατά το δυνατόν”의 기능입니다. 소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마치 왁스처럼 형태를 각인시킵니다. 각인이라는 말은 찍어낸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물론 형태가 출현하는 데에는 물질적인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조건을 물질의 “고유한 요망 사항”에서 발견하려고 합니다. (Bloch, MA: 143).

 

물질은 형태를 실현해내는 토대이며, 소재 속에는 무언가 실현하는 가능성이 상당 부분 다양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물질의 두 번째 특징에 해당하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 δύνάμει ὅν”를 지적합니다. 물질 속에는 실현을 요구하는 가능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요소를 열정적으로 강조합니다. 물질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찍어내지만, 물질이라는 모태 속에는 고유한 능력에 해당하는 수용력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15. 물질 속의 능동적 에너지 내지는 물질의 고유한 역동적 능력: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더 이상 수동적으로 형태를 요구하는 무엇이 아니라, 물질의 모태에는 형태를 산출하는 능력, 즉 의지, 충동 그리고 갈망 등과 같은 고유한 능력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끊임없이 더욱 훌륭한 형태를 산출해내는 물질의 충동 저장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물질은 끝없이 형태를 동경하고, 최상의 형태를 자극하기 때문에, 형태의 동력이 실현을 위해서 연속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Bloch, MA: 144, Bloch, PH: 238).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식으로 물질 속의 역동적 에너지를 찾아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 속에 형체를 잉태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물질의 원칙을 제시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블로흐는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으며,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물질의 개념이 상기한 방식의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정도의 계기를 암시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물질 속에 도사린다고 추론되는 역동적 에너지 내지는 세력은 블로흐의 주장에 의하면 중세 11세기와 12세기의 아라비아 철학자와 유대 철학자들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아비케브론)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그리고 조르다노 브루노의 철학에서 명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철학이 물질의 문제점을 논하는데 제각기 이질적인 요소를 지니지만, 이들의 입장은 블로흐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물질의 능동적 에너지 내지는 물질의 고유한 능력을 밝혀내었다는 데에서 놀라운 성과를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Bloch, MA: 518). 이로써 지적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물질의 고유한 역동적 능력이라고 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