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 블로흐의 물질 이론

필자 (匹子) 2024. 9. 10. 10:57

(앞에서 계속됩니다.)

 

6.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아비케브론: 중세에는 아라비아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아비케브론이었는데, 특히 의학의 영역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비켄나(이븐 시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물질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원한 무엇이라고 파악했습니다. 그는 최상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고 형태인 신(神)은 더 이상 권능을 지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loch, MA: 510).

 

신은 아비켄나에 의하면 물질 속에서 잠자고 있는 형태를 깨우는 자이며, 형태를 추출해내는 자세를 견지한 분이라고 합니다. 아베로에스 (이븐 루슈드)는 아비켄나의 사상적 단초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이론을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모든 형태는 아베로에스에 의하면 소재의 잠재적 능력으로부터 도출해 나온다고 합니다. 제반 형태는 양적 측면에서 물질에서 발전될 뿐 아니라, 질적 측면을 고려할 때 물질 속에 이미 가능성으로서 내재하며, 차제에 다양한 면모로 구분된 채 나타납니다. 신은 아베로에스에 의하면 모든 가능성을 주어진 현실로 이끌고 인도하는 동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비케브론(이븐 가비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수용자로서가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자로 더 잘 알려진 철학자이자 시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물질 이론을 개진하면서, 원래 고수하던 신-플라톤주의의 단계 이론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가령 플로티노스의 단계 이론은 물리적으로 이해되는 물질을 우주 질서의 가장 낮은 단계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정신적 물질은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물리적 영역의 물질 개념으로부터 일탈되고 있습니다. 아비케브론은 이러한 단계 이론을 거부하고,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우주적 물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물질과 육체적인 물질은 어느 정도의 차이에서 약간 다르다고 합니다. 모든 형태는 아비케브론에 의하면 하나의 우주적인 실체에 해당하는 물질로부터 태동합니다.

 

7.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철학: 중세의 기독교 스콜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을 계속 연구하였습니다. 가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라비아 철학자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형태와 물질 사이의 이원론을 내세웠습니다. 이로써 아비켄나 등의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물질의 특징은 미약하게 되었으며, 신의 영역은 물질의 개념 속에서 하나의 예외적 사항으로 취부되었습니다. (Bloch, MA: 159).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중세에서 인정받던 형태와 물질 이라는 이원론은 서서히 파기되었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아비케브론의 물질 이론을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물질이란 그 자체 실체라는 유일한 원칙이며, 형태의 근원이자 동시에 모태라는 것입니다. (G. Bruno: 60.) 형태는 브루노에 의하면 그 자체 오로지 물질에서 다양하게 드러난 면모라는 것입니다. 브루노는 신의 어떤 목적 원칙에 의해서 형태가 반드시 출현하게 된다는 기독교의 가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은 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물질은 신과 동등하다고 브루노는 주장합니다.

 

스피노자 역시도 브루노와 유사한 범신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신은 스피노자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필연적인 신성(神性)의 도움으로 만물은 특정한 방식에 따라 존재하는 식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라만상에는 우연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신 자체가 바로 실체라고 합니다. 실체로서의 자연만이 형태를 산출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스피노자에 의하면 오로지 완전한 내재성으로서의 원칙입니다. 물론 정신과 물질은 대칭을 이루지만,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에서 파생된, 서로 다른 부분품이라는 것입니다.

 

8. 라이프니츠가 고찰한 물질: 17세기 후반부터 자연과학적 사고는 자연 철학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물질을 주로 양적인 측면에서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가령 뉴턴과 갈릴레이는 물질을 어떤 개체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물질은 이들에 의하면 덩어리 내지는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홉스와 데카르트는 물질을 어떤 확장 가능한 형체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에 반해서 뉴턴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라이프니츠만이 물질의 지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단자들Nomaden”은 양적으로 확장되는 무엇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원자와 같은 물체도 아닙니다. 단자들은 물질이 지니는 힘의 중심부인데, 스스로 발전되고 다양한 형체들을 산출해내는 존재입니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영혼의 단자” 그리고 “벌거벗은 단자”로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의식과 기억을 지닌 무엇이며, 후자는 아톰이라고 합니다. 특히 “벌거벗은 단자”는 스피노자에 의해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으로 잠재력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에너지의 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울에 비친 단자들에는 경향성 내지는 “열망appetitus”이라는 특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경향성은 “발아하는 불안정성inquiétude poussant”을 지니는데, 공간이 비좁을 경우, 비약해서 이동하기도 합니다. 단자들은 스스로 목적 원인을 지닌 채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며, 변모와 과정의 가능성을 추구합니다. (희망의 원리D, 1791).

 

9. 칸트가 고찰한 물질: 그런데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는 자연 과학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칸트의 물질 개념은 당김과 밀침이라든가 관성과 팽창 등과 같은 기계론적 합법성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칸트의 글,『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Die metaphysischen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7)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물질의 당김과 밀침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물질의 동력이 어떻게 발전되는가? 하는 물음에 관해서 더이상 집요하게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먼 훗날 현대의 자연 과학은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밝히고 있습니다. 물질은 움직임, 즉 운동이라는 구성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운동이란 고전 물리학이든 양자 물리학이든 간에 공통으로 주어진 상태의 진화라는 의미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되는 게 아니라, 보편적 발전 개념의 제한 사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0. 에른스트 블로흐의 물질 이론: 블로흐는 물질에 관해 깊이 천착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즉시 학문적 결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블로흐의 물질 이론은 「아직 아닌 존재의 존재론에 관하여Zur Ontologie des Noch-Nicht-Seins」라는 제목으로 1961년 튀빙겐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이 논문은 1970년에 간행된 『튀빙겐 철학 서언』에 실려 있습니다. 완전한 시스템으로서의 블로흐의 물질 이론은 1972년에 간행된 『물질 이론의 문제점. 그 역사와 실체』에 세부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이른 나이에 탐구하기 시작한 범주론은 1975년에 간행된 『세계의 실험』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밖에 블로흐가 단편적으로 개진한 물질 이론은 블로흐 사후에 간행된 『물질의 로고스』에 실려 있는데, 이 책에는 블로흐가 젊은 시절부터 탐구한 물질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블로흐는 오랫동안 조직적 사상가로 인지되지 못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은 『희망의 원리』에 반영된, 유토피아의 강렬한 파토스를 중시하면서, 물질 이론에 관한 블로흐의 이론을 등한시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1950년대에 라이프치히의 학생들은 블로흐의 물질 이론에 관해서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 이론에 관한 블로흐의 문헌들은 라이프치히 박사과정 학생들의 세미나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 당 (SED)이 1957년에 블로흐를 대학에서 강제로 퇴임시켰는데, 이때 눈 위의 가시로 작용한 것이 바로 물질 이론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물질의 개념은 여기서 “어떤 관념적 인간 중심적인 시스템의 기본적 카테고리”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시스템은 “자연과 인간의 생산하는 본성을 신격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Rochhausen: 88).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