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9) 블로흐 용어 해제

필자 (匹子) 2024. 7. 16. 09:49

(앞에서 계속됩니다.)

 

재-기억 Anamnesis [플라톤은 진리는 과거에 존재했던 원형으로서의 이데아이며, 오로지 이러한 이데아를 다시 기억해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블로흐는 지금까지의 철학이 이러한 과거 지향성에 구속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헤겔 역시 모든 지식은 과거 속에 자리한다고 주장하면서, 미래를 가볍게 생각하면서 무시하였다. 지금까지의 대부분 철학적 사고는 블로흐에 의하면 과거만을 중시하고 과거 사항만을 다시 환기할 뿐이라고 한다. 이로써 등장하는 것은 과거지향적 반동주의라고 블로흐는 주장한다. 변증법을 숙고한 헤겔 역시도 역사적 변증법이 오로지 처음과 시작을 연결시키는 원(圓)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했다. 미래는 헤겔에 의하면 흩날리는 왕겨와 같은 무엇으로 떠올랐을 뿐이다.

 

태초의 진리를 중시하는 이러한 과거 지향적 사고는 기독교 신학에서 언급되는 “아포카타스타시스αποκατάστασης”의 자세에서 비롯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인위적 상태를 원래의 자연 상태로 재정립하는 일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다. “달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Nihil novi sub luna”라는 과거 지향적 보수주의는 오로지 근원을 중시하고, 모든 사항이 근원으로부터 파생된 “아류 Epigonen”로 성급하게 규정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존재는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새로운 현실에서 태동하지 않았다.

 

태초의 진리는 우리를 권위적이며 근원적 인식 속에 갇히게 한다. 이로써 무시되고 배격되는 것은 미래지향적 최종적 특성 내지는 궁극성이다. 마지막의 순간 내지는 해방의 사건은 변화와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무엇을 통해서 마침내 발현된다. 그것은 마지막 개벽이다. 그렇기에 블로흐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의 경우 창세기로서의 알파가 아니라, 요한 계시록에 실려 있는 오메가이다. 새로운 무엇은 예술의 경우 예측된 상이고, 정치 경제학의 경우 공산주의의 미래 사회에 나타나게 될 자유의 나라라고 한다. 요약하건대 재-기억은 블로흐에 의하면 태초 중심주의, “원전 중심주의 Originalität” 과거를 동경하는 수구 반동주의를 당연시하게 하는 시금석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전선 Front [전선은 블로흐가 서술하는 변모의 존재론에 의하면 “새로운 무엇Novum”, “극한성Ultimum”과 함께 실현의 과정에서 언급되는 카테고리를 가리킨다. 전선은 인간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무엇을 접하게 되는 맨 앞부분, 시간적으로 맨 처음에 만나는 순간의 상을 가리킨다. 전선은 그냥 사는 순간의 “지금”을 무언가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전선은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토피아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Bloch, TE: 227).

 

그렇지만 그것은 때로는 그냥 사는 순간의 어두움 속에 머물게 한다. 전선은 무언가 성취해낼 기회이기 때문에, 주체의 단호한 결단력을 요청한다. 블로흐는 이와 관련하여 “의연한 걸음der aufrechte Gang”을 언급하고 있다. 전선의 개념은 언제나 “오늘을 붙잡아라Carpe diem”라든가, “절호의 기회kairos”와 불가분의 관계에 처해 있다. 왜냐면 인간은 실제 삶에서 소극적 태도로 머뭇거리다가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는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전체성 Totum [여기서 말하는 전체성은 블로흐의 용어로서 최종적으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전체적 특성을 가리킨다. 루카치는 전체성 대신에 “총체성Totalität”d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특성과 의향에 있어서 총체성은 블로흐의 전체성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루카치는 계급 갈등을 드러내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갈등의 현상과 본질 사이의 모순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을 총체성이라고 규정하였다. 총체성이 하나의 보편적 구도와 불변의 형식으로 처음부터 고착되어 있는 객관성이라면, 블로흐가 말하는 전체성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변화 내지는 과정에서의 움직임을 중시한다. 전체성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은 변화를 촉구하는 역동적 과정 그리고 시간의 의미이다. (Bloch, MA: 468) 블로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 개념을 바탕으로 주관적 동인을 강조하고 있다. 전체성은 두 개의 가능성, 즉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κατά το δυνατόν” 그리고 “가능성을 지닌 존재 δύνάμει ὅν”가 작동되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주어는 아직 술어가 아니다 S ist noch nicht P [블로흐는 “아직 아님”의 존재론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 문장을 자주 활용하였다. (Bloch, EM: 41). 첫째로 현존재는 처음에는 불충분함 속에 둘러싸여 있으며, 고유한 존재로 거듭나려고 노력한다. “과정의 실체는 고유한 사실 속의 현실적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Bloch, SO: 517). 둘째로 상기한 문장은 세계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세계는 처음부터 완성된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반복해나간다. 블로흐는 세계의 변화 과정을 “고난의 행군”에 비유한다. 행군의 에너지는 나중에 소진될 수 있지만. 헤겔이 주장한 대로 처음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인간이 목표로 하는 내용은 블로흐에 의하면 “사물 이전 ante rem”, 다시 말해서 세계 창조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완결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주어진 세상에서 단순히 선점할 수는 없다. 블로흐에 의하면 세계 역사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다. 세상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무엇은 오로지 올바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부단한 노력에 의해 쟁취될 수밖에 없다. (Bloch, TE: 117)]

 

주체 객체 Subjekt Objekt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주체를 인간으로, 객체를 주어진 세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블로흐에 의하면 단선적이라고 한다. 주체와 객체의 개념은 관찰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대상으로 파악되는 존재는 객체이며, 자신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존재가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자연 역시 얼마든지 가설적 동인으로서의 주체로 파악될 수 있다고 한다.

 

블로흐는 세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 행위를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바꾸어 말해 주체 그리고 객체, 자신 그리고 주변 세상 사이의 움직임과 진동(振動)이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변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는 주체의 동인과 객체의 동인이 마구 뒤엉켜 있다. 이 경우 주체의 동인은 충동의 에너지를 우선적으로 지닌 채 객체의 모순을 탐색하고, 모순 극복의 가능성을 타진하곤 한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인 관계는 이런 식으로 탐색과 타진이라는 운동 속에 결착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변화의 열쇠 내지는 발전과 변모를 위한 지렛대를 활용하는 임무가 아닐 수 없다.

 

블로흐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독일 고전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파악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블로흐에 의하면 물질의 구조에서 엿보이는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한다. (Bloch, SO: 198f). 블로흐는 『주체와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는 주체와 객체가 제각기의 측면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유동하며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주체는 스스로 해방된 존재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불충분함을 극복하고, 자신의 실체를 획득하게 된다. (Bloch, SO: 510). 이러한 동일성은 인간 역사의 측면에서는 혁명이라는 계급투쟁을 극복한 다음에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곳에서, 물질 역사의 측면에서는 완전한 실체로서의 자연 공간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블로흐는 이러한 동일성의 장소를 고향이라고 명명하였다.].

 

질적 특성 Qualität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Jakob Böhme에 의하면 질적 특성은 이른바 연금술의 방식으로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17세기 초기의 장미십자단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요한 발렌틴 안드레에는 질적 변화의 현상을 연금술을 염두에 두면서 “화학의 결혼”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렇듯 물질의 근본적인 변화는 질적 특성을 도외시하고는 생각될 수 없다. 질적 변화의 중요성은 야콥 뵈메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서 학문적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뵈메는 깊은 숙고를 통해서 자신의 사고를 서투른 언어 속에 담았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놀라운 착상을 발견하게 된다. 독일어 단어 “quellen 부글거림”이라는 단어에 착안하여, 귀한 사물의 탄생을 한마디로 “물질의 발효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부글부글 발효하는quellen” 사물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고통 Qual”의 과정을 통하여 “근원 Quelle”으로부터 어떤 놀라운 "질적 특징Qualität"으로 새롭게 탄생한다고 한다. 이렇듯 사물의 형태는 뵈메에 의하면 물질의 부글거리는 발효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엄청난 내적인 고통을 견디면서 태동한다. 질적 특성은 고통의 발효 과정을 거쳐서 외부로 출현하는 무엇이므로 양적 특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초험성 Transzendenz [초험성은 인식 한계의 초월성을 뜻하는 개념이다. 누구든 간에 만사를 통달할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의 경험은 어차피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철학의 사고는 경험을 넘어서려고 하므로, 경험의 제한성에 의존할 수는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 단어를 경험을 벗어나는 특성, 즉 정험성 내지는 초험성의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시간적 관점에서 언급되는 “a priori 선험성”과 유사하다.]

 

최고선 Summum bonum [최고선은 지상을 “고향”으로 만들려는 의향과 관련되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훌륭한 최고 상태”의 삶을 발견하려고 했다. 궁핍함을 떨쳐버리려고 최고선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왔다. 최고선은 하늘나라이며, 신의 나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 블로흐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훌륭한 최고 상태를 발견하려 한다. 사회주의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므로, 구체적 유토피아를 실천할 수 있는 이상이다. 그것은 당위성으로서의 사상이며, 그 자체 인간 삶의 목표와 관련된다. 삶의 목표는 블로흐에 의하면 “유일성unum, 진리verum, 선(善)bonum”, 다시 말해서 최고선이라고 한다. 그것은 길이며 목표다. 왜냐면 최고선이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면서, 아울러 그리로 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Bloch, PH: 1562).

 

다시 말해 삶의 과정 속에는 이미 목표를 포함하는 궁극적 실체가 도사리고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목표라는 자궁 속에는 과정이라는 아기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 과정은 미래에 출현할 무엇을 암시해주고 그리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블로흐에 의하면 변모의 과정에서 발견된다. 인간은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는다. 진정한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출발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미래의 시점에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블로흐의 좌우명, “변모 속의 존재 Sein im Werden”는 목표를 포괄하는 과정으로서의 이상이며, 블로흐가 추구하는 “고향 Heimat”의 개념과 같다.]

 

초-동시성 Übergleichzeitigkeit [블로흐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천착했지만, 초-동시성에 관해서는 많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느 사회든 간에 도시와 시골, 세대 차이 등을 감안할 때 인간은 비록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의식 구조 내지는 세계관을 견지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경제적 토대에 따라 생각하는 방향과 관심사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회적 갈등 역시 동시대인들의 경제적 상태, 직업 그리고 관심사 등에 근거한 견해 차이의 소산이다. 주어진 사회는 제반 이질적 사항들로 인해 다층적으로 중첩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는 동시적이고 비동시적인 모순들이 뒤엉켜 있으며, 역사의 걸음걸이는 때로는 의연하게. 때로는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속에는 주어진 미래가 방해당하고 있다.” (Bloch, EdZ: 122) 만약 우리가 뒤엉킨 모순의 사회에서 오래되었든 새롭든 간에 바람직한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면, 인간의 역사는 본연의 방향으로 걸음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람직한 무엇이 바로 미래의 관점을 고려하는 초-동시성을 가리킨다.)

 

칼람의 교사 Motekallemin [블로흐는 「아비켄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에서 중세의 찬란한 이슬람 문화 그리고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아비케브론에 관해서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Motekallemin”은 “칼람의 교사” 내지는 “칼람의 이슬람 연구자”로 번역된다. 여기서 칼람은 아라비아어로 “대화 논쟁”과 직결되는 단어이다. 칼람의 교사들은 신학적 세계관을 오로지 꾸란, 수나 그리고 오성의 측면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수니파 법학 연구가들이 이들에 해당한다. (Bloch, MA: 149, 168)] 칼람의 교사는 지식인의 비극적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단적 신앙의 횡포에 맞서서 이성적으로 싸우는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10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