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이론 – 실천 Theorie – Praxis [블로흐는 이론과 실천을 역사에 나타난 어떤 단절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역사의 단절이란 마르크스 이전의 역사, 마르크스의 시대 그리고 마르크스 이후의 역사라는 세 가지 구분을 가리킨다. 이론과 실천에 관한 사고는 철학사에서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관찰 능력 그리고 실천 능력을 서로 구분했다. 이에 비하면 중세 철학은 “명상적 삶vita contemplativa” 그리고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을 서로 달리 해명하면서, 인간 삶의 목표는 세계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르네상스 철학을 중요하게 고찰한다. 그 이유는 신시대의 철학이 세계 그리고 세계의 발전 가능성에 커다란 기대감을 표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근대에 이르러 독일 관념 사상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마르크스에 의해 중세의 유신론의 가치를 타파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블로흐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우선권과 관련되는 유동적인 가치를 공통으로 인정하게 된다. 블로흐는 특히 미국의 실증주의를 염두에 두면서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였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11번째 「포이어바흐 테제」,)
미국의 실증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진리가 사업적 필요성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고는 그게 유용하기 때문에 진정한 게 아니라, 그게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Bloch, PH: 321).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블로흐에 의하면 “계급”이라는 사회적 장애물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Mensch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블로흐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바람직한 질문은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라고 한다. (Bloch, EM: 173). 인간은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다. 설령 30세 어른이라 하더라도 인간 동물은 생존하는 한 발전의 과정에 처해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인간은 완성된 “유적 존재Gattungswesen”가 아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노동을 통해서 자신이 유적 존재임을 증명해 나간다.)
인간은 블로흐에 의하면 스스로 일하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다. 마치 물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서 필연과 유연이라는 상호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산물이듯이, 인간 역시 이러한 전철을 밟는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우연을 스스로 조종하면서 변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블로흐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를 물질과 마찬가지로 비-목적론적인 마지막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인간 존재는 물질과 마찬가지로 (물질 속에서)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의 걸음을 걸어간다.]
“인간의 사회적 삶이 비스듬하게 경사져 있다면, 인간은 수직으로 의연하게 걷지 못한다. Wenn das soziale Leben eines Menschen schief ist, kann er oder sie nicht konsequent vertikal gehen.” [블로흐의 이 말은 두 가치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처한 정치적 지형도는 평탄하지 않고 비틀어져 있다. 세계의 질서는 가진 자의 기득권에 의해 강향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측으로 편향되어 있다. 이러한 토대에서 억지로 수직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그 자체 체제에 순응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저항적으로 반대편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인간은 싫든 좋든 돈과 권력에 고개를 숙이곤 한다. 굴종하는 인간은 언제나 허리를 굽히며 눈을 아래로 향한다. 블로흐는 항상 “남에게 잘 보이려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노예근성”이라고 말했다.]
자연 제휴, 제휴 기술 Naturallianz Allianztechnik [블로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제반 기술을 기만 기술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기술은 비-유클리드의 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을 구분시키고, 자연 착취는 거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대신에 블로흐는 자연 친화적인 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집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중개된 자연 주체 그리고 자연의 건축물 위에 우뚝 선 작은 세계와 같다. 기술 유토피아는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을 공멸이 아니라, 상생으로 이끄는 수단이어야 한다. (조영준 2: 352).
기술 유토피아는 인간과 자연의 소외되지 않은 상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의 토대 하에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다. 노동하는 인간은 역사적 주체로서 자연과 의식적으로 연대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는 블로흐에 의하면 오로지 마르크스주의의 지평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한다. 문제는 블로흐가 자연과 인간의 상호 작용을 도모하는 제휴 기술을 중시하지만, 원자력 에너지의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미래의 생태 평화적 기술에 적절한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블로흐는 20세기 중엽에서는 원전이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지니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자연 주체 Natursubjekt [블로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 “원-소재Urstoff”를 언급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시민 사회의 모든 기술은 오로지 상품과의 관련 속에서 중시되었으며, 모든 것은 수지타산이라는 계산으로 소외되고 말았다. 자연은 그저 상품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처녀지로 가치 하락하고 말았다. 헤겔은 지구의 존재를 마치 거인의 시신(屍身)이라고 간주했다. 말하자면 지구는 마치 생명력을 상실한 거인처럼 우리의 발아래에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헤겔에 의하면 역시 이전에 완전히 폐기 처분된 곡식의 껍질에 불과하며, 인간은 이러한 껍질에서 튀어나온 낱알이라는 것이다. (Bloch, TE: 235).
이에 비하면 블로흐는 인간의 의지와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자연의 고유한 특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철학자 헤겔은 자연을 오로지 객체, 다시 말해서 일방통행의 관점에서 고찰했는데, 블로흐는 이와는 달리 자연 속에 사용 가치로서의 객체 외의 어떤 다른 고유한 내재적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자연의 주체적 특징이다. 자연 주체는 물질 개념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 “자연 속에 도사린 어떤 행위하고 추동하는 특징”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Teller: 60). 셸링은 자연 주체를 “의식 없는 지성 내지는 산출한 자연”으로 이해하였다. 자연은 무언가를 산출하고, 역사에 다시 생명력을 부여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자연의 암호는 주체와 객체 관계를 연결하게 해주는 가교로서의 싹이나 다름이 없다. (Bloch, MA: 221).
블로흐는 언젠가 조르다노 브루노가 야콥 뵈메의 연금술과 연결된 신비주의에서 찾아낸 바 있는 물질의 “발효하는 실체 die gärende Substanz”의 개념을 도입한다. 물질은 브루노에 의하면 마치 존재의 자궁처럼 어떤 발효의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를 끊임없이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질은 어떤 실체가 발효하는 모태이다. 실체는 물질 속에서 꽃으로 만개하여, 나중에 열매를 안겨주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 주체의 진면목이다.” (Bloch, LdM: 173). 세계의 실체는 잠재성과 경향성을 반영한 물질인데, 물질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의 논리성 그리고 세계에 합당한 실체로서의 물질은 세계의 우주적 법칙 내지는 물질의 변증법과 일치를 이룬다. 자연 주체는 블로흐에 의하면 자신의 에너지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노동으로 인해서 수동적으로 변화되어 나간다고 한다. (Bloch, EM: 277).]
자유 Freiheit [블로흐는 자유를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 양식”이라고 규정하였다. (Bloch, Natur: 186). 인간의 의지와 행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행위의 자유는 내가 행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외부의 자연적 사회적 단대로 인해서 방해당하는가? 하는 물음과 관계된다. 이에 비해 의지의 자유는 우리가 자신의 고유한 갈망에 따라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아니면 이 경우 내적으로 강요당하거나 외부로부터 조종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된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은 긍정적 부정적 자유의 개념으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성과 부정성은 논리적 측면에서 이해될 뿐, 가치의 측면에서 평가될 수는 없다. 부정성으로서의 자유롭다는 말은 편견, 의무감 그리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말이다. 긍정성으로서의 자유롭다는 말은 어떤 이유에 대한 검증, 무언가에 대한 갈망과 결정, 목표 설정 등을 자유롭게 수행한다는 말이다. (BWB: 144). 그렇기에 긍정적 자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블로흐에게는 윤리적 자유, 다시 말해 도덕적 요구와 목표를 결정하고 수행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Bloch, TM: 139).]
잠재성 Latenz [잠재성은 모든 존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특성으로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표 내용을 내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특성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철학은 물질의 숨어 있는 본질에 관해 깊이 관여하지 못했다. 블로흐는 잠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통해서 자신이 의도하는 개방적 존재론을 놀라운 범위에서 개진할 수 있었다. 블로흐는 『세계의 실험Experimentum Mundi』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잠재성은 기대 공간의 유형 속에서 마치 오래된 하늘의 마지막 유형처럼 나타나 훌륭한 작업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Bloch, EM: 147). 물질의 기능은 초월 없는 초월 행위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추상성을 극복해내고 있다.
블로흐는 잠재성의 개념을 무엇보다도 물질 이론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과정과 운동은 블로흐에 의하면 잠재성과 경향성의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현세의 변화는 놀랍게도 소외된 현존재에서 파생되는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노력 내지는 잠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잠재성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면 잠재성이 그 자체 목적 원인으로 기능하는 변증법적 물질 이론을 잘못 파악하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블로흐 역시 이를 인정하면서 잠재성을 다음과 같이 활용한다. 즉 잠재성은 물질의 변화 과정을 전제로 할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 das Noch-Nicht-Gewordene”을 자극하고 중개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 은폐된 것은 놀라운 잠재성에 의해서 추후에 모습을 드러낸다.]
(10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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