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 das Noch-Nicht-Bewußte,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 das Noch-Nicht-Gewordene [오래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갈구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쟁취하지 못한다. 갈망이 없으면, 기대하는 무엇이 감지되지 않게 되고 근접 불가능하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Heraklit Frag. B. 18). 마찬가지로 세계에는 아직 출현하지 않은 무엇이 득실거린다. 이것은 잠재적 특징을 지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인데, 세계에 아직 발현되지 않고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무엇을 가리킨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진리는 경험에 의존한다.”라는 존 로크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세상에는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수많은 무엇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는 수학의 미적분을 원용하여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을 찾아내었다.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은 과거보다, 특히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데, 안타깝게도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과거 지향적 의향에 의해 무시되고 말았다. (Detlef Horster: Bloch zur Einführung, Hamburg 1987, S. 54). 블로흐는 라이프니츠의 사고에서 오랫동안 사장되어 있던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의 미래지향적 특징을 도출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정서는 갈구하는 정서로서의 희망이다. 설령 이러한 정서가 전-의식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파악되더라도 심리의 배후에는 어떤 예견하는 의식이 자리한다. 이것이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인데, 아직 명료히 인지되지 않는 주체의 성향과 같다,
역사는 블로흐에 의하면 “항상 그대로semper idem”의 무엇이 아니라, 역사의 걸음걸이는 때로는 지그재그로, 때로는 앞으로 나아간다. (Materialien 125). 블로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세계의 성향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무엇”으로 규정하였다. 세계는 처음에는 잠재된 존재의 상태로 머무는데, 내부에 도사린 물질의 자극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외화(外化)하고 발현한다. 모든 존재를 출현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자극을 가하는 것은 “희망”이라는 인간적 의향이다. 그렇기에 예견하는 의식으로서의 인간의 희망은 근본적으로 주체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아직 의식되지 않는 무엇”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은 블로흐가 견지하는 “아직 아님”이라는 존재론의 기본적 토대이다.
아포카타스타시스 αποκατάστασης [아포카타스타시스는 그리스어로 “복구”를 가리킨다. 이는 복구, 복원을 통한 새로운 질서 확립, 실현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신학적 관점에서 우주적 구원의 종말의 시접에서 모든 사물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행위를 뜻한다. 창조주에 의해 탄생한 피조물은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했는데 (αποστασης), 모든 존재는 신의 도움으로 서로 화해하여 일원성을 이루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시작, 다시 말해서 태초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점성술의 의미에서 회귀 내지는 환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포카타스타시스가 과연 과거에 존재했던 이상으로서의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블로흐는 아포카타스타시스를 마지막 구원으로서의 묵시록의 개벽 내지는 근본적 변화로 이해하면서, “재기억”과는 무관하게 파악하고 있다.]
예견 Antizipation [이 단어는 목적에 합당하게 미리 주어진 무엇을 가리킨다. “라틴어 anticipatio”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선취에 해당하는 “πρόληψις”에서 유래했는데, 의미심장한 무엇에 대한 발견과 추적의 전제 조건으로 활용된 바 있다. {Diogenes Laertius 1999 X 33).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이 단어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에 대한 주관적 등가 존재로 사용하고 있다. 예견은 미래를 선취하는 인간의 보편적 능력이라고 한다. 예견은 충동 이론적으로 고찰할 때 굶주림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견의 개념은 블로흐의 초기 작품에 이미 등장한다. 그것은 “새로운 무엇의 도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Bloch, TLU: 107).
블로흐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제 6 명제에서 예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이란 개개인 속에 자리하는 부동의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 사회 현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앙상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조건은 주어진 구체적 상태에 의해서 확정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무엇 역시 이러한 조건을 극복해야만 실질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블로흐의 예견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보상받지 못했다. 전-세계로 확장된 신자유주의의 사회 경제적 삶 그리고 생태 위기는 “더 이상 선택 가능성은 없다.”라는 부정적 정황을 현대인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시각과 함께하는 예견의 자세일 것이다.]
예지적인 intelligibell [인간은 눈앞의 현실만을 바라보지만, 철학적 사유는 이를 넘어서는 보편적 관점을 통찰할 수 있는 시각을 요청한다.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는 진리는 무엇보다도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에 주어져 있다고 한다. 현상계를 넘어서는 영역(예지계)을 사유하는, 즉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사유(추리)하는 능력은 오성이 아니라 이성이다.]
예측된 상 Vorschein [예측된 상Vorschein은 탁월한 예술 작품 속에서 엿보이는 더 나은 미래에 관한 예술적 형상이다. 그것은 예술 작품 속에 반영된 더 나은 미래가 미리 드러난 선현(先顕)의 상 내지는 예견antizipation의 상이다. 예술가는 예술적 대상이 품고 있는 경향성 그리고 잠재성을 극한으로 탐색하면서, 어떤 미래의 가능한 상을 형상한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 최종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예측된 상이다. 만약 예술이 사물과 예술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거울이라면, 작품은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너에 관한 이야기다.De te fabula narratur.” (Bloch, LA: 34).
예측된 상의 미학은 고전주의가 추구하는 “교정 미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전주의의 미학은 정태적 현실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면서, 어떤 완전성에 근접하려 할 뿐이다. 세계는 문화적 작용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규범적인 틀로써 명작이냐, 아니냐를 판독할 수는 없다. 더 나은 미래의 가상적 현실상은 지금 여기의 현재 상태와는 구별되는 무엇이다. “미적ästhetisch”이라는 단어는 예술가가 대상의 직접적이고 자연적이며 역사적인 현상이 아니라, 내적으로 성취된 본질적이고 물질 이론적으로 진정한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인지 행위αίσθησης”라는 어원을 지니지 않는가?
예술은 세계의 발전 내지는 파멸을 직접 촉구하지는 않지만, 엔텔레케이아의 한계선상에서 세계의 다른 형상, 세계의 변화된 모습을 끊임없이 추동한다. 한마디로 예측된 상은 현실 너머의 “지평Horizont”에 도사리고 있는 참된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약하건대 예측된 상은 예술 작품에 피상적으로 묘사된 상이 아니라, 예술 작품에 숨어 있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예술적 예견이며, 선취라고 말할 수 있다.]
완전 가능성 perfectibilité [비교: perfectio (정태적) 완전성. (계몽주의에 이르러 오래전부터 인간이 신학적으로 갈구해 왔던 정태적 완전성의 자세를 떨치고, 미래의 바로 이 장소에서 인간이 갈구하는 완전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자세는 “사간 유토피아 Uchronia”로서 근대 사회에서 의미론적 확장을 이루게 된다. 가령 장작 루소는 프랑스 사회가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는 발전을 거듭했지만, 도덕과 정치의 영역에서는 기이하게도 퇴보를 거듭했음을 지적하였다. 이로써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숙고했는데, 자신이 상각하는 방안의 특징을 한마디로 완성 가능성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고려할 때 완성 가능성은 “perfectio (정태적) 완전성”과는 달리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 특징을 지닌다.]
외연 Daß [블로흐는 외연으로서의 “틀 daß” 그리고 내포로서의 “무엇Was”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역사의 궁극적 목표하고 구명한다. (Bloch, EM: 71) 외연과 내포는 형식과 내용, 하나의 틀과 틀 속에 담길 수 있는 성분으로 이해되는데, 논리학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하나의 틀로서의 범주 그리고 틀 속에 담길 수 있는 구성 성분으로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연을 감각으로서의 “ότι”로, 내포를 오성으로서의 “διότι”로 명명했는데, 나중에 캔터베리 출신의 안셀무스는 전자를 “quidditas”로, 후자를 “quodditas”로 달리 표기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이를 따랐다. (Bloch, ZW: 74). 근대에 이르러 프리드리히 W. J. 셸링은 외연성을 “Daßheit”라고 명명하였고, 내포성을 “Washeit”로 지칭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토대 Grund”를 참고하라.]
우시아 usia [우시아는 누스nous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빛의 일원성으로 이해된다. 모든 존재는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비가시적인 우시아에서 유출되어 나온다. 이 경우 물질은 마지막 단계로서의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플로티노스는 물질의 고유한 운동성을 거의 부정하고, 물질에 마지막의 무기력한 특징을 부여하고 말았다. (Bloch, MA 38)]
유토피아 Utopia [블로흐는 구동독에서 유토피아의 용어 사용을 꺼렸다. 그 이유는 구동독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토피아를 역사적 일회적 차원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가령 유토피아는 19세기 유럽에서 제기된 오언, 푸리에, 생시몽 카베 등의 사고로 매도되었다.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의 국가 소설에서 파생된 개념으로서 더 나은 국가에 관한 틀 내지는 토대를 가리킨다. 유토피아가 만인의 평등과 행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블로흐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가 바로 “구체적 유토피아의 새로운 무엇”이라고 한다. (Bloch, EM: 188)
그런데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개념을 확장하였다. 이로써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갈망의 중요성이 인정받으면서, 천년왕국설 내지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은 문학 유토피아로서의 국가 소설과의 관련성 속에 편입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필자의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4권을 참고하라.]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핍박당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적 기대감 역시 유토피아의 사고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소설이 더 나은 국가에 관한 정태적인 구도로 이해될 수 있다면,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은 사회 변혁을 위한 역동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는 폭발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개념과 기능은 심도 있는 논의를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리하르트 자게에 의하면 모어의 정태적 수동적 갈망의 상을 벗어날 수 없으며, 임의로 방만하게 확장될 수 없다고 한다. (Richard Saage: Utopieforschung 1. An der Bruchstelle der Epochenwende von 1989, Lit: Münster 2008, S. 159). 만약 우리가 리하르트 자게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블로흐가 추적한 유토피아의 의향, 즉 인간이 갈구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유토피아로 편입될 수 없을 것이다.]
(10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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