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소외 Entfremdung [소외는 블로흐에게는 인간학 그리고 사회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부정적 개념이다. 이는 인간의 처지가 자신으로부터, 타자로부터 그리고 자연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소외와 반대되는 개념은 정체성Identität이다. 정체성은 존재 그리고 본질의 합일이며, 주체와 객체의 “얼굴 교환” (Bloch, TE: 45)이라는 성취된 순간에서 형성된다. 그렇게 되면 개별적 자아는 상호 아무런 손해 입지 않은 채 “우리Wir”로 변하게 된다. 소외는 자아가 폐쇄되고 분열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소외의 상태는 자기, 권력 그리고 객관의 세계가 동등한 가치를 상실한 상태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무언가 결핍된 사회 내지는 계급적 갈등이 드러난 세상에서 서로 투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소외의 극복에 관한 블로흐의 사상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연에 의해서 수행된 인간화”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수행된 자연화”와 접목되어 있다. (Bloch, PH: 327). 그렇지만 블로흐는 소외의 극복을 마르크스와는 달리 해명한다. 왜냐면 그는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으로서의 자연 주체에 관한 이념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자연은 그 자체 주체로서 오래전부터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처신해 왔다. 다시 말해 자연 역시 인간 역사에서 창출된 소외 현상에 대응해 왔다는 것이다. 소외 현상은 인간의 경제적 생산 양식에 의해서 출현하게 된 것이다. 만약 소외가 극복되면, 인간사와 자연사의 주체는 어쩌면 동일화의 과정을 밟으리라고 블로흐는 확신하고 있다.]
습득한 희망 docta spes [김진 교수는 이 단어를 “교학적 희망”이라고 규정하였다. (김진 4: 269). 여기서 블로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은 가르치는 교사의 기능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의 기능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습득한 희망”으로 표현해 보았다. 습득한 희망은 블로흐가 쿠자누스Cusanus의 「가르친 무지에 관하여De docta ignorantia」 (1440)에서 예리하게 찾아낸 전문 용어이다. 쿠자누스는 몰아(沒我)의 자세로 신을 경배하는 보나벤투라를 비판하면서, 신에 대한 맹목적 찬양은 그 자체 오류이며, 인간은 믿음과 지혜를 스스로 배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조건 낙관적 태도로 막연히 행복을 수동적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희망을 습득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는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고난과 비극의 파국적 정황이다. 블로흐는 구체적인 희망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서, 후천적으로 배우고 습득하려는 자세를 “습득한 희망”이라고 표현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자발적으로 배워나가는 일이라고 한다. 인간은 주어진 오늘 속에 은폐된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das Noch-Nicht-Bewußte”을 찾아내고, 그 속에 굳건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는 “아직 아님”의 특징을 도출해내어,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가능한 예견을 설정할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스스로 배워나갈 수 있는 습득한 희망이라고 한다.]
실체 Substanz [실체는 라틴어로는 “substantia”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고유하고 단단하게 서 있는 특성의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사물의 본질, 현존재의 토대 내지는 존재의 본질적 특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블로흐의 실체 개념은 자연 주체에 관한 가설을 기본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실체의 개념은 -세계를 단단한 고체로 파악하려고 의도하는 “명사적 요소론”의 세계관과는 달리- 무엇보다도 과정이라는 유연한 변화의 흐름을 강조한다. 논리적 차원에서 “주어는 아직 술어가 되지 못했다.”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Bloch, TE: 195). 세계는 인간의 노동으로써 어떤 경직되고 분할된 고체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차제에는 어떤 발효하는 변화를 위해 만곡을 그리는 식의 액체와 기체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로흐는 이를 과정의 실체 내지는 실체의 과정으로 명명한다. 아니 그것은 실체로서의 과정이고, 과정으로서의 실체이다. 과정의 실체는 전달 내지는 전승의 카테고리도 아니고, 형체의 카테고리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실험실에서 “최종적 물질materia ultima”을 찾으려는 유토피아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싹이라고 한다. (Bloch, EM: 246). 발효하는 무엇은 물질 속의 주체이며, 찬란한 꽃과 열매를 안겨주는 주체의 실체라고 한다. 이러한 실체는 블로흐에 의하면 어둡고 육중한, 수없이 어긋나는 과정의 길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Bloch, LdM: 173). 철학의 행위는 블로흐에 의하면 세계의 문제를 내용상으로 포괄하기 위해 마치 원처럼 둥글게 이동해나갈 수밖에 없다.]
실현의 아포리아 Aporie des Erfüllens [인간은 블로흐에 의하면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존재다. 어떤 갈망이 성취될 경우 당사자의 마음속에서는 충족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새로운 갈망이 불현듯 솟아오른다. 성취의 순간, 어떤 또 다른 욕망이 인간의 전의식 속에 기묘하게 첨가되어, 이른바 갈망의 충족으로 솟아오르는 내적 만족을 방해한다. 이로써 이전의 갈망은 새로운 갈망으로 순간적으로 교체된다. 블로흐는 이러한 정서를 “실현의 아포리아”라고 규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어린아이가 꿈속에서 무지개에 가까이 다가가면, 무지개는 아이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 있다. 놀라운 것은 성취로 인한 만족의 강도는 애타는 갈망의 그것보다도 미약하다는 사실이다. 블로흐는 이에 대한 이유를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 - 1274)의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사물들은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 고상하게 비친다. Res nobiliores in mente quam in se ipsis.” (박설호 1: 218).
어떤 무엇에 대한 갈망의 강도는 어떤 무엇에 대한 성취의 그것보다도 훨씬 크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성취의 우울 내지는 실현의 아포리아를 해명하려고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둘러싼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극 작품에서 묘사한 바 있는 헬레나를 둘러싼 망령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실재하던 헬레나는 평범하게 생긴 여인으로서 토로이의 파리스와 함께 도주하여 이집트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그리스 사람들은 파리스가 그리스의 미녀를 납치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로써 전개된 트로이 전쟁은 극작가에 의하면 헬레나에 관한 망령의 상으로 인해 10년 동안 전개되었다고 한다. 실현의 아포리아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인간이 추구하는 무엇은 인간으로부터 도망치는 무엇Quid quaerendum, quid fugiendum”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아디아포라 ἀδιάφορα [아디아포라는 선악을 따질 때 제외해야 하는 별개의 사항을 가리킨다. 스토아학파 그리고 기독교 신학자들은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 가령 생명, 아름다움 그리고 건강 등을 도덕적 중립에 해당하는 “중간 존재”를 “아디아포라”라고 명명하였다. (Bloch, MA: 38) 에피쿠로스, 칸트 그리고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는 아디아포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선한 행위 악한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 아님 Noch-Nicht [아직 아님은 블로흐의 존재론을 언급하는 핵심 사항이다. 아직 아님은 존재 그리고 본질 사이 내지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동질성을 지향하려는 의향을 지닌다. 인간은 순간의 어둠 속에서 행복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그냥 살아간다, (Bloch, PA: 477). 세계는 가장 바람직한 무엇과는 거리가 멀다. 현존재는 아직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세계는 인간에게 어떤 “구원의 가능한 실험실Laboratorium possibilis salutis”이다. 블로흐는 현존재가 존재로 변화되는 겻을 하나의 구원이라고 이해한다.
블로흐는 아직 아님과 관련하여 세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첫째로 하이데거가 현존재와 존재의 구분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데 반해, 블로흐는 현존재가 여러 실험적 과정을 거쳐서 존재로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블로흐는 “모든 없음Nichts” 그리고 “아님Nicht”을 서로 구분한다. 아직 아님은 없음이 아니라, 어떤 결핍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아직 아님은 변화를 축구하는 특성, 즉 과정 속의 경향성을 뜻하며, “모든 있음Alles” 그리고 “모든 없음Nichts”은 세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잠재성과 관련된다. 셋째로 니힐리즘은 블로흐에 의하면 사회적으로 몰락하는 부르주아의 의식 상태를 말해주는 사고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니힐리즘은 철학에서 중요한 핵심 사항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패망, 괴로움 그리고 절망 등과 같은 심층부를 정확하게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약하건대 아직 아님은 블로흐의 희망 철학의 기본적 면모를 전해준다.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유토피아의 사고로서의 희망을 급진적으로 개방하기 때문이다. 습득한 희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최상의 고착된 상태가 아니라, 다음에 도래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의 가능성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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