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가나다 순)
표현주의 Expressionimus [표현주의는 블로흐의 경우 예술 사조 내지는 예술 창작의 방법론을 넘어서는 미학의 사상으로 이해된다. 표현주의에 대한 블로흐의 견해 속에는 블로흐가 추구하는 두 가지 의향이 도사리고 있다. 그 하나는 “출범의 카테고리Kategorie des Aufbruchs”이며, 다른 하나는 구원의 가르침을 지칭한다.(Münster, Arno: Utopie, Messianismus und Apokalypse im Frühwerk von Ernst Bloch, Frankfurt a. M. 1982, S. 185).예술 작품에 반영된 “더 나은 다른 삶”은 인간이 갈구하는 최상의 예술적 상 속에 용해되어 있다. 블로흐는 루카치의 총체성을 시종일관 비판했다. 총체성은 전환의 시기에 계급 투쟁 속에 도사리고 있는 현상과 본질 사이의 모순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Bloch, PA: 588f).
그런데 총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전환의 시점에 드러나는 상징과 알레고리의 조각이라고 한다. 블로흐는 표현주의 논쟁에서 예술을 특정 시대에 국한하지 말 것을 설파하였다. 시민 사회의 예술에서도 얼마든지 체제 비판의 모티프가 부분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 시민 사회의 예술은 특정 계급의 퇴폐적 병리 현상을 노출하지만, 일부분 구출되어야 마땅하다. 왜냐면 거기에는 더 나은 삶의 현실적 조건을 암시해주는 특징적 암호가 은폐되어 있다고 한다.(Bloch, PH: 253). 그것은 미완성 내지는 단장의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특수성, 부조화 그리고 불연속성 등의 특징보여준다. 표현주의 예술은 지상의 투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구원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 블로흐는 표현주의를 고딕 건축 양식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표현주의는 고딕 예술의 유산이라고 한다. 표현주의는 장신구의 특수한 형체, 생명의 나무의 놀라운 색채를 활용하고 있는데, 예술 자체가 “인간성의 핵심에 도달하려는 유토피아의 의향”을 시사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Bloch, EdZ: 261).]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 [1783년 간행. 정확하게는 『Prolegomena zu einer jed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이다. 프롤레고메나의 어의는 “학문에 대한 서설(序説)”이라는 뜻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간행한 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학문에 대한 서설이며 여기에서 학문이란 형이상학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을 엄격하게 학문이라고 말하면 공감하기 어렵고 또 이 학문에 진보도 없다. 그러나 학문이 아니라고 말하면 형이상학 문제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며 이론물리학자들도 형이상학적 문제를 계속 가지고 있는 범례가 적지 않다. 칸트는 이 근본 문제를 풀기 위하여 제1비판에서도 하였지만, 거듭해서 이 책에서 분석적으로 규명하려 하였다. 이 책 서문에는 칸트의 “나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학설휘찬 (学説彙纂) Digesten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527 – 565)는 로마법 대전 (Corpus Iuris Cicilis)를 왕성하여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전이 바로 학설휘찬 (Digesta: Pandektae)이다. 법학자 트리보니아누스의 주재 아래 16인의 법률가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해 530~533년에 편찬된 법 모음집을 가리킨다. 위원들은 권위 있는 법학자들의 저술을 전부 수집하고 검토하며,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모두 발췌하였다. 일반적으로 주어진 법적 논점에 대하여 오직 하나만을 발췌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명료성과 간결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원본을 재구성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50권의 법 모음집은 각권이 표제별로 세분화되어 있다. 이 문헌은 당시의 현행법으로 활용되었다.]
한류 Kältestrom 난류 Wärmestrom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두 가지 방향성을 논하면서 한류와 난류를 언급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한류는 지금 여기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정밀하고 냉엄하게 분석하는 작업을 가리킨다면, 마르크스주의의 난류는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찬란한 미래를 예술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선취하려는 제반 작업을 가리킨다. 한류와 난류,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Bloch, MA: 372), 블로흐에 의하면 사회주의 정치 경제학자들은 전자, 그러니까 근시안적인 자세로 한류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 난류, 즉 더 나은 미래 사회에 관한 열광적 갈망을 마냥 등한시하였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많은 사화주의자들은 주어진 현실 분석을 통한 “가까운 목표Nahziel”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마르크스가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언급한 “자유의 나라”라는 “먼 목표Fernziel”를 소홀히 하였다는 것이다. 한류와 난류에 관한 블로흐의 이론은 양자 이론, 포스트모던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 사상을 위한 혁신적인 모티프로 활용될 수 있다. 블로흐가 지적하는 “비합리적 오성”, “행동하는 열광주의”는 백인 남성의 로고스 중심주의에 맞설 수 있는 아비투스로 활용될 수 있다.]
행동 규범 norma agendi 행동 능력 facultas agendi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제반 규범은 객관적인 법이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법이 특정 사회의 질서로서 인간 행위의 규범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규칙을 담은 객관적인 법은 행동 규범으로 명명될 수 있다. 그런데 블로흐에 의하면 법의 눈(眼)은 대체로 지배자의 얼굴에 박혀 있다. (자연법: 575). 만약 지배자가 제반 인민에게서 빌려온 권한을 남용할 경우 행동 규범은 잔인한 공권력으로 남용될 수 있다. 이러한 공권력은 사악한 행동 규범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차제에 인민들의 “행동 능력 facultas agendi” (이를테면 촛불 집회)을 부추기게 된다. 인민의 저항은 블로흐에 의하면 민주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한다.]
“허영이란 인간이 벗을 수 있는 마지막 옷이다. Die Eitelkeit ist das letzte Kleid, das der Mensch auszieht.” [허영이란 헛된 명예욕을 가리킨다. 남들보다 더 잘 보이고, 더 낫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은 타자를 전제로 한다. 만약 주위 사람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아담과 이브는 더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형이상학 Metaphysik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의 영역과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영역에 관심을 기울였다. 형이상학은 그에게는 세계 내적 경험의 영역에 고착되지 않는 철학 행위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형이상학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즉 “감각적 인식에서 벗어나는 이성에 의한 초감각적인 무엇을 추구하는 학문”이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Immanuel Kant: Vorlesungen über die Metaphysik, Erfurt 1821, S. 17.) 블로흐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정림하는 데 있어서 칸트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을 일차적으로 따르고 있다. 블로흐로서는 마르크스의 관점의 형이상학으로서 두 가지 모티프를 중요하게 도입한다. 그 하나는 변증법적 방법론이며, 다른 하나는 백과사전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Bloch, PA: 484)
새로운 형이상학을 정립하는 일은 아직 아닌 존재론을 확립하는 과업인데, 구체적 유토피아를 찾는 작업과 같댜. 다시 말해서 새로운 형이상학은 변화와 새로움을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존재론을 지칭한다. 그것은 초월 없는 초월 행위와 다르지 않다. (Bloch, TE: 356).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는 “훌륭하게 종결되는 일res bene finita”이 아니라, “훌륭하게 수행되는 일res bene peracta”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아닌 존재론을 확립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과정과 변모를 중시한다. 존재의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은 인간의 노동과 인간의 희망 행위를 통해서 실천되어야 한다. 이로써 과정의 형이상학은 블로흐에 의하면 긍정적인 방식으로 모든 현-존재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희망 Hoffnung [희망은 블로흐의 문헌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이다. 세계의 과정은 아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노력한다. 희망은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과 반대되는 정서는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억일 수 있다. (Bloch, PH: 10f.) 희망이 인간의 고유한 원리인 까닭은 희망으로부터 형이상학이 태동하며, 이러한 심리적 상태로부터 언제나 더 나은 무엇이 변증법적으로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블로흐는 『튀빙겐 철학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핍함은 사고를 이끈다.” (Bloch, TE: 14). 그 때문에 블로흐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계시의 신학,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사상적 단초, 조아키노 다 피오레의 천년왕국설, 토마스 뮌처의 사회 혁명적 이념이라든가, 변증법적 물질 이론과 칸트의 인간학을 추적해나간다.
희망의 개념은 심리학, 역사철학, 신학 그리고 예술의 영역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희망하는 행위 자체이며, 희망하는 목표에 대한 추구를 뜻한다. 이로써 희망의 원리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무엇을 탐색하고, 어떤 간절한 갈망에 데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 희망은 무조건 무언가를 기대하는 수동적 정서는 아니다.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희망은 근본적으로 환멸을 동반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확신일 테니까.” (Bloch, LA: 387). 블로흐는 무작정 뜬구름 잡는 정서를 예찬하지 않았다. 미래의 찬란한 삶을 위해서 현재 상태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가까운 목표와 먼 목표, 두 가지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순화하고 제련하는 것이 진정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낙관하지 않는 희망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흔적들 Spuren [『흔적들』은 블로흐가 1930년대에 발표한 미셀러니 저작물이다. 흔적들은 한마디로 자신의 사상을 “하나로 압축해놓은 미세화une miniature en relief”와 같다. 블로흐는 『흔적들』을 집필할 때 여러 가지 자료를 미리 원용한다. 말하자면 동화, 예술 동화, 에피소드, 기담 등을 일차적으로 도입한 다음에 이에 대해 학리적 해석을 내린다. 짧은 글들은 주어진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블로흐 사상의 핵심과 관련되는 다양한 모티프를 지적한다. 이것들은 처음 보기에는 가벼운 미셀러니를 연상하게 하지만, 깊이 고찰하면 우리는 흔적들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갈망 기계의 착상” (들뢰즈) 속에서 크고 작은 깊은 함의를 추출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것들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이러한 흔적들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착상들이다. (Bloch, SP: 82).
진정한 삶은 아직 아닌 무엇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변화되는 것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 “아직 아님”이라는 자극이 연속적으로 출현한다. 지금까지 존재론은 대체로 “존재하는 무엇에 관한 이론”에 집착해 왔다. 후설과 하이데거 등은 블로흐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을 하나의 변화하지 않는 정태적인 무엇, 즉 확정된 고체로 이해해 왔다. 여기에는 변모와 전환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블로흐는 인간과 세계에 결여한 무엇이 “아니 아님Noch-Nicht”이라는 과정을 거쳐 종국에는 “모두 없음” 그리고 “모두 있음”으로 변화되리라고 확신한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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