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갈구하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한다.” (헤라클레이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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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들』은 1930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몇몇 글들이 첨가되었다. 글들의 배경이 20세기 초의 프로이센 시대라는 점에서 독자들은 과거의 문헌에 해당한다고 치부하기 쉽다. 물론 『흔적들』은 집필의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 (1928)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한줌의 도덕Minima moralia』 (1951) 등과 궤를 같이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흔적들』에 실린, 일견 사소한 이야기의 주제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을만한 함의를 안겨준다. 그것은 짤막한 소품 모음집이라는 이유에서 블로흐 사상의 에스키스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될 수 없다. 블로흐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명징한 사고는 때로는 짤막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라고 말하곤 했다. 제각기 독자적으로 전해지는 짤막한 이야기 속에는 블로흐가 추구하는 인간의 복잡한 사상과 심리의 구조가 복합적으로 엉켜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블로흐의 글들은 어쩌면 자신의 사상을 “하나로 압축해놓은 미세화une miniature en relief”라고 표현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왜냐면 여기에는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 그리고 낮꿈, 전선 그리고 새로운 무엇으로서의 희망이라는 블로흐 고유한 미래 지향적 시각이 고스란히 놀라운 착상 내지는 “깨달은 사고Eingedenken”로 혼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블로흐의 글에는 특유의 단상과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다. 글들은 때로는 철학적 단상으로, 때로는 편안한 수필로 읽힌다. 블로흐는 『흔적들』을 집필할 때 여러 가지 자료를 미리 원용한다. 말하자면 동화, 예술 동화, 에피소드, 기담 등을 일차적으로 도입한 다음에 이에 대해 학리적 해석을 내린다. 짧은 글들은 주어진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블로흐 사상의 핵심과 연결되는 다양한 모티프를 지적한다. 이것들은 처음 보기에는 가벼운 미셀러니를 연상하게 하지만, 깊이 고찰하면 우리는 흔적들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갈망 기계의 착상” (들뢰즈) 속에서 크고 작은 깊은 함의를 추출할 수 있다.
인간의 크고 작은 갈망은 때로는 바람처럼 스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놀라운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앞의 사실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갈망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간과하곤 한다. 그래, 『흔적들』은 블로흐 사상의 동인과 토대를 함축한다는 20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전집을 짤막하게 요약해 놓은, 압축된 저작물이다. 가령 18권의 블로흐 전집을 편찬한 부르크하르트 슈미트Burghart Schmidt가 『흔적들』을 블로흐 전집의 제1권에 배치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블로흐의 『흔적들』은 무엇보다도 자신과 세계를 추동하는 주체의 의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맨 처음 동원되는 이야기들 (그림과 안데르센의 동화, 천일 야화, 카를 마이의 무협 소설, 기담, 랍비 이야기, 아가타 크리스티의 탐정 소설, 제임스 쿠퍼James Cooper의 모험 소설 요한 페터 헤벨Johann Peter Hebel의 『달력 이야기』 등)은 이러한 의향을 찾아내기 위한 범례로 작용한다. 맨 처음 전해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크고 작은 갈망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갈구하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블로흐의 작품은 네 가지 단락, 즉 상태, 운수, 현존재 그리고 사물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로 상태는 인간과 세계에 주어져 있는 현실적 조건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자신이 처한 경제적 조건 속에서 활동하지만, 이 와중에서 광범하게 솟구치는 것은 주어진 여건의 변화에 대한 크고 작은 갈망이다. 이 경우 피해당하지 않으려는 은폐의 욕구 또한 갈망의 근처에 꿈틀거리고 있다.
둘째로 운수라고 해서 숙명 내지는 운명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블로흐는 행운과 불행의 이어짐과 차단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여러 각도에서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행운과 액운 자체가 아니라, 이로써 나타나는 인간의 심리적 반작용이다. 누구든 액운을 비켜갈 수는 없지만, 처절한 경험이 오히려 역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안겨준다. 블로흐는 셋째와 넷째, 즉 현존재 그리고 사물의 관점에서 갈망의 흔적을 계속 밝혀나간다. 우리 주위에는 갈망의 흔적들이 묘하게 은폐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우리 본연의 고유한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는 불안, 노여움, 미움 그리고 우울 등의 감정과 뒤섞여 우리에게 인지된다. 이러한 네 가지 정서는 우리의 심리 속에서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콤플렉스로 뒤섞인 채 병적 증상의 불꽃을 점화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의 갈망, 즉 낮에 꾸는 꿈은 최상의 경우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대체로 뇌리를 스쳐 지나간 다음에 소리 없이 파기되고 만다. 갈망은 때로는 무언가를 태동하게 하는 변화의 효모로, 때로는 부정적 결과를 사전에 차단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갈망의 힘, 즉 죽음조차도 불사하는 엄청난 에너지로 성장할 수 있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파기하고 허망한 무엇으로 소멸하게 화하게 하는 무기력함으로 사라질 수 있다. 블로흐는 일상에서, 동화에서 그리고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가담에서 이러한 변화의 효모 내지는 방어기제 등을 찾아내고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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