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이야기 속에는 불을 밝히는 촛대가 등장한다. 그것은 올바르게 빛을 밝히고 있다. 랍비는 어떠한 지양 (止揚)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이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에 관해서도, 촛대에 관해서도 아무런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랍비는 상인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놀라운 무엇을 깨닫게 해주지도 않는다. 랍비는 막연히 주위에서 발견한 촛대 하나를 마치 “행운의 징표”로 건네주었을 뿐이다.
얼핏 보기에 마법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 속에는 기이할 정도로 냉정한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 침묵하는 랍비는 하나의 기적을 신봉하는 유대인 상인, 쇼텐 앞에서 거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랍비는 쉽사리 속을 간파할 수 없는 냉소주의적 인간처럼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헬슈타트 출신의 발셈 랍비는 “계몽된” 인간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몽이란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파악된 특수하고도 단호한 유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계몽적 유대주의는 유령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유령이라는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계몽된 자는 인간 그리고 (악령과는 다른) 신 앞에서 결코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름끼치는 이야기 속에는 유령을 처음부터 용인하지 않는, 어떤 개입 내지 포착이 작용하고 있다. 비단 상인은 오늘날에도 생동감 넘치게 이해되는, 잘 알려진 순간 무언가 개입하고 포착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행운의 손으로 명명될 수 있다. 이것은 실천적 직관과 관련되는 말이다. 주어진 사물들을 완전히 뒤바꾸지는 않지만, 다만 정확히 포착하여 원래의 자리에 배치하는 실천적 직관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어떤 행운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어떤 사물은 어두운 세상 속에 은폐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감춘 채 던져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합리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의미로서의 “기술” 또한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통상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오래된 “마법”이 작동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랍비는 유대인 상인과의 만남에서 무언가를 붙잡으려 한다. 그것도 매우 집요하고도 세심하게 그리고 매우 교훈적인 방법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말이다.
랍비는 흔히 말하는 행운의 “징표”를 신봉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우주의 에너지라든가, 세계의 질서를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랍비는 자신이 개입하는 기이한 손의 의미를 입증해내고 있다. 그것은 분산된 사물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그것을 동시에 짧은 기간 동안 에덴동산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메시아적으로 선택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랍비가 유대인 상인에게 건네준 촛대는 “최상의 의미로 활용”된 셈이다. 그것은 주어진 한계 상황에 필요한 욕구에 따라 유용하게 쓰였다. 그렇지만 상황이 이와는 정반대라고 가정한다면, 촛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운명 속에 포착될 수 있는 어떤 행운을 암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촛대 위의 불꽃은 어쩌면 “천국”을 환하게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 이를 고려한다면 촛대는 사물이 아니라, 그 자체 선 (善)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른다.
랍비는 무엇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유대인 상인이 그 무엇을 정확하게 활용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성스러운 언어를 활용하여 랍비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눈 셈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통방 (Kassiber)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촛대 속에 담긴 소중한 의미는 생존의 외침을 뜻하는데, 이러한 의미는 놀랍게도 성스러운 언어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두 사람 그리고 골트슈티커를 제외한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비밀스러운 언어로 표현된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다. 이러한 의미는 불가해한 세계 속에서 성스럽게, 혹은 세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자고로 이 세상의 사물은 그 자체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물을 올바른 방향 속으로 옮겨놓는 개입 내지 포착이다. 설령 이따금 그것을 어둠 속으로 이전시키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말이다. 문제는 그 배경의 왜곡된 무엇 내지 불확실한 무엇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카발라주의를 신봉하는 어느 다른 랍비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의 나라를 건립하려면,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개방시키기 위해서 모든 사물들을 깡그리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저 이 찻잔이라든가, 차나무, 혹은 저 바위 등 모든 사물의 위치를 조금씩만 옮겨놓으면 족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부분을 행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그 기준을 발견하기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인간은 세계의 변화와 관련되는 일을 결코 혼자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메시아라고 한다.
이로써 현명한 랍비는 자신의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엉금엉금 기어나가는 발전이 아니라, 행운의 눈빛 내지 행운의 손의 비약과 관련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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