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마리루이제 플라이서 (1901 – 1974)
여자: 마리루이제 플라이서의 극작품은 오늘날에도 상연되고 있지요?
남자: 네, 그미는 1920년 뮌헨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브레히트를 만났습니다.
여자: 바이에른의 소도시, 잉골슈타트는 자신의 고향 내지는 영원한 쉼터와 같았군요. 이에 비하면 뮌헨과 베를린은 그미에게는 격변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의 낯선 대도시였을까요?
남자: 그렇습니다. 1926년 플라이서의 극작품, 「잉골슈타트의 연옥Fegefeuer in Ingolstadt」이 베를린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그해 여름 플라이서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브레히트와 만났는데, 브레히트는 그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작품의 집필을 종용하였습니다. 이때 완성된 작품 가운데에는 「잉골슈타트의 공병들Pioniere in Ingolstadt」(1929)이 있습니다. 작품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다뉴브강으로 진군한 군인들과 이를 둘러싼 소도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자: 브레히트와 플라이서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남자: 1926년부터 두 남녀 사이에 일시적으로 애정이 싹텄는데,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브레히트를 사랑하는 여성은 참 많았습니다. 일례로 1929년 브레히트가 바이겔과 결혼했을 때, 플라이서는 이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동맥을 끊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Fuegi: 329).
여자: 하우프만도 그 당시 자살했다고 했지요? 좋든 싫든 브레히트가 매력남인 것은 분명하군요.
남자: 플라이서의 극작품 「잉골슈타트의 공병들」은 1929년 베를린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를 주선한 사람은 소설가 리온 포이히트방거였지요. 공연은 거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바이마르 연극계의 엄청난 파장을 남기게 됩니다. 연출을 담당한 브레히트는 작품의 여러 장면을 과감하게 뜯어고쳤습니다. 등장인물인 하녀, 베르타는 화약 창고에서 군인, 콜에게 겁탈당하는데, 이 장면은 어떤 열정적인 음악적 리듬과 가미된 채 거창하게 공연되었습니다.
여자: 플라이서의 작품은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 착색된 채 해석되었다고 하지요?.
남자: 네, 작품을 관람한 잉골슈타트의 사람들은 플라이서를 이른바 “고향을 더럽히는 극작가”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플라이서는 브레히트와 격하게 다툰 뒤에 헤어지고 맙니다.
여자: 극작가와 감독 사이의 알력이 문제였군요.
남자: 네, 먼 훗날 플라이서는 당시의 체험을 소설 『전위 예술가들Avantgarde』(1962)에서 기술된 바 있지요.
여자: 플라이서는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남자: 1935년 플라이서는 고향의 수영선수인 요제프 하인들Josef Heindl과 결혼하여 그와 함께 담배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미는 나치의 압박 그리고 갑갑하고 지루한 결혼 생활 등으로 인하여 신경 발작을 일으켰지요. 1958년 남편이 사망한 다음에 플라이서는 창작에 전념했습니다. 이후 플라이서는 자신의 삶의 애환을 창작 활동으로 승화시켜서, 문학사에 남을 명작들을 완성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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