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6) 여인들의 브레히트, 사랑의 슬픔

필자 (匹子) 2024. 3. 31. 09:55

 

6.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1897 1973)

 

여자: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의 창작을 돕던 도우미였지요?

남자: , 그미의 삶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습니다. 평생 네 번 결혼한 것이 이를 반증하지요. 사랑의 실패로 인하여 그미는 두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첫 번째의 자살은 브레히트가 헬레네 바이겔과 결혼했을 때 행해졌으며, 두 번째의 자살은 1949년에 그미의 남편, 파울 데소Paul Dessau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음악가, 파울 데소는 55세의 나이에 27세의 젊은 여배우, 안체 루게Antje Ruge를 사랑하며, 무작정 동거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여자: 그미는 언제 어디서 브레히트와 안면을 익히게 되었습니까?

남자: 1924년 초에 베를린이었습니다. 브레히트는 그미의 재능을 즉시 알아보고, 키펜호이어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의 작품들을 수정하고, 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작품 창작을 위한 번역 작업도 서슴지 않았지요. 브레히트를 위해서 키플링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여자: 그러다가 눈이 맞았군요.

 

남자: , 두 사람의 관계는 1925년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몸, 마음 그리고 사고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게 하우프트만의 지론이었습니다. 브레히트의 책상 위에는 주요 원고들 Hauptmanuskripte이라는 제목의 자료가 언제나 놓여 있었는데, 이 단어는 하우프트만이 작성한 브레히트의 원고들 (Haupt + Manuskript)”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자: 그렇다면 브레히트는 그미를 애인으로 조력자로 이용했는지요?

 

남자: 아닙니다. 브레히트는 충분한 수당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Kebir 1997: 29). 그미는 당시 문예지에 자신의 번역을 기고함으로써 별도의 수입을 얻었지요. 실제로 1920년대에 브레히트의 창작을 도와준 사람은 하우프트만이었습니다. (Fuegi: 210). 만약 그미가 없었더라면 서푼짜리 오페라, 도살장의 성녀 요한나등의 작품은 제 때에 발표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브레히트의 3막 오페라,마하고니의 흥망 성쇠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에 실려 있는 알라바마 송은 추후에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의 시작품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여자: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를 알게 될 무렵, 그의 주위에 여성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감지했지요?

남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브레히트는 귀여운 남자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920년대에 유럽 여성들의 눈에는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실천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남성은 여성과 동등한 관계에서 얼마든지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쾌락의 대상으로서 남자를 얼마든지 취할 수 있고 저버릴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Kebir 1997: 72).

 

여자: 1930년대부터 브레히트와 하우프트만은 급속도로 소원해졌지요?

남자: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한 다음에, 1934년 초에 하우프트만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였습니다.

여자: 1930년대 중엽부터 하우프트만의 협력 작업을 담당한 사람은 마르가레테 슈테핀이었지요?

남자: 브레히트가 1948년에 오랜 망명을 접고, 동독으로 귀환했을 때, 하우프트만은 늙은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미는 1948년부터 베를린 앙상블에서 일하면서 브레히트의 작업을 도와주었지요. 브레히트가 사망한 다음에는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의 문서를 정리하면서, 책을 간행하는 데 진력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