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쿠네르트의 '모자의 이름으로'

필자 (匹子) 2024. 1. 25. 10:25
 

"모자의 이름으로"는 쿠네르트가 196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구 동독의 작가 동맹의 기관지인 "신독일 문학 (NDL)"에 부분적으로 발표되었으며, 같은 해에 서독에서 책으로 간행되었다. 구동독에서는 1976년에 비로소 간행되었다. 쿠네르트는 지금까지 시와 단편만을 써왔는데, 악한 소설 (Schelmenroman) 내지는 -알프레트 되블린 (A. Döblin)이 주로 다루었던- 시대 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가령 마력적인 모자 그리고 마법의 외투인 도롱이라든가 주인공의 초자연적인 재능과 같은 익살스럽고도 기괴한 요소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림멜스하우젠 (Grimmelshausen)의 "짐플리치시무스 (Simplizissimus)" 그리고 귄터 그라스 (G. Grass)의 "양철북 (Blechtrommel)"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주인공 헨리는 희비극적인 인물로서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피가로와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의 제 1장부터 제 4장까지는 1945년까지의 전쟁시기에 겪었던 주인공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사건의 전개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게 아니라, 과거의 체험 내지는 주인공의 상념 등으로 차단되곤 한다.

 

소설의 무대는 폭탄으로 파괴된 베를린이다. 16세의 헨리는 인민 돌격 전위대에서 근무하는데, 우연히 자신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다. 그것은 당사자의 과거와 미래를 간파하는 이른바 신통력이었다. 주인공은 돌격 대장, “호르스트” 바인라인의 모자를 쓰는 순간, 상관인 호르스트가 탈영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헨리는 상관의 탈영 계획을 돕는다. 그 뒤부터 헨리는 무엇보다도 모자의 도움으로 전쟁의 혼란스러운 나날을 극복하고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초능력은 언제나 행운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총살당한 자의 모자를 통해서 그는 어떤 끔찍스러운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시체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유태인 아버지였던 것이다. 헨리의 아버지는 연료를 공급하는 지하실에 숨어 전쟁 시기를 보냈는데, 전쟁이 끝나는 순간 자유를 찾아 만세를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이때 그는 극우 나치 당원에 의해 총살당했던 것이다.

 

이제 헨리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는 친구, 오토를 찾아간다. 오토는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하는데도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다. 모든 것을 망각하려는 오토의 태도는 전후의 사람들 사이에서 팽배해 있었던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은폐시키는 처사를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주인공 헨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커다란 거부감을 느낀다. 오토는 주인공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귄터 쿠네르트가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는 모습 

 

 

주인공, 헨리는 끝내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찾아낸다. 그는 다름아니라 벨머 박사이다. 벨머 박사는 이른바 인간애를 표방하는 독일 종교 단체를 결성하여, 그곳에서 대표 이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과거의 나치 행적으로 교묘하게 은폐하고, 이제는 전혀 다른 신앙 깊은, 선량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헨리는 벨머 박사에 대해 증오심을 느끼고 그를 살해하려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끝내는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주인공은 벨머 박사에 의해서 설득 당한다. 말하자면 벨머 박사는 헨리의 증오심을 잠재우고 평온하게 살아가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또한 헨리의 신통력은 자신의 단체를 위해서 얼마든지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의 원수를 값겠다는 의지는 서서히 꺾인다. 결국 헨리는 벨머 박사의 도움으로 동베를린의 관청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 순간 주인공의 신통력은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자들은 헨리의 삶에서 끝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건 전개를 이어가게 하는 연결고리로서 작용한다. 어쩌면 쿠네르트는 “망각을 완전히 잊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과 사회의 능력으로서의 기억의 능력을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려고 했다. 주제 상의 측면 외에도 작가의 언어는 구조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주인공이 겪는 이질적인 경험으로 인한 혼란을 아주 훌륭하게 묘사한다. 사건은 때로는 아이러니하고도 풍자적으로, 때로는 서정적이고도 통속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당시의 은어, 고전 작품의 패러디, 간결한 문장 때로은 화려한 문체 등은 세밀한 독서를 요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