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르웨이 여성작가 브란첸발히: 노르웨이 여성작가, 가르드 브란첸발히 (Gerd Brantenberg, 1941 - )의 소설작품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저자의 이름이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라고 소개되었으나, 필자는 스웨덴어의 발음대로 “가르드 브란첸발히”라고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에갈리아의 딸들 Egalias Døtre』(1977)이라는 장편소설입니다. 브란첸발히는 1941년에 오슬로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의 런던과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영어, 역사 그리고 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오슬로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여성의 집”을 개관하여 그곳에서 핍박당하는 여성들을 돕기 위해서 의미 있는 일로 봉사했습니다.
브란첸발히는 오래 전부터 이 작품 외에도 여성 신문과 여성 잡지에서 수많은 칼럼을 발표하여 사회 내에서의 여성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현재 전-지구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질서는 여성의 발전을 거의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원활하게 실천되고 있는 노르웨이라 하더라도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여성해방의 운동이 참다운 결실을 맺는 데에는 더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작품의 부제로 채택된 “성의 투쟁에 관한 소설”은 그 자체 아이러니를 드러냅니다.
2. 에갈리아 공동체, 혹은 여성중심주의: 작가는 어떤 가상적인 에갈리아 공동체를 묘사합니다. “에갈리아 Egalia”는 모권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곳에서 성의 역할은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여성들이 대부분의 권력을 차지하고, 성의 측면에서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극심한 차별을 당하면서 고난의 삶을 이어갑니다. 여자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알몸을 드러낼 수 있지만, 남자는 밖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생식기를 가려야 합니다.
작품에서는 언어의 영역에서도 성의 역할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성적으로 여겨졌던 모든 첨가어들은 여성의 권익을 높이기 위해서 달리 사용됩니다. 이를테면 “인간”이라는 단어는 “여생 Wibschen”으로 쓰이며, “남성 지배”라는 단어는 교묘하게도 “여성 지배”로 교체된 지 오래됩니다. 여자는 대인이고, 남자는 소인으로 일컫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책의 첫 번째 부분은 인습에 의해서 축조된 어떤 전통적 문체로 기술되어 있는데, 두 번째 부분에서는 모든 사항이 여성 중심적으로 변해 있습니다.
3. 남성을 차별하는 세상: 남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출산할 수 없으므로, 에갈리아에서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합니다. 그들은 여성에 비해 무기력한 그룹에 예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남자들은 다만 서류상으로 한 여성에게 속하는 부권적 존재로 기록될 뿐이며, 주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담당합니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중요한 일을 처리하도록 도와줄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남자들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여성들의 시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갈리아 공동체는 1월과 2월이 되면 공동체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되는 남자들을 위해서 무도회를 개최합니다. 이때 여성들은 “여성대인”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젊은 남자들을 처음으로 “남자소인”으로 명명합니다. 그들은 성 노리개로 전락한 남자소인들을 제 마음대로 대하면서 마음 내키면 남자의 동정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들의 성을 억압하면서, 그들에게 “PH”라는 표시를 부착하게 합니다.
물론 “에갈리아”에서는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자유로운 질서가 용인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채택할 수 없는 직업이 있습니다. 가령 어부 내지 마도로스의 직업은 오로지 여성만이 전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사회적으로 행할 수 있는 직업은 대체로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규범은 공동체 내에서 남성들이 경제적인 권력을 여성에게 모조리 빼앗겼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성들은 멋진 축제를 통해서 아이들을 출산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매일 빨래, 음식장만 등과 같은 달갑지 않은 집안일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가사노동이 사회적으로 천한 일감으로 취급당하는 까닭은 지루하게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4. 동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 브란첸발히는 무작정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은 지금까지 정치적 사회적 힘을 행사하는 자들에 의해서 영위되었는데, 주로 남성들이었습니다. 만약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면, 여성들이 정치적 사회적 힘의 분배에 과연 얼마만큼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가? 작가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천착하려고 했습니다. 기실 인간 삶의 불평등은 주로 노동의 불공평한 분배 그리고 돈의 불공평한 분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성 사회는 가부장 중심의 노동과 돈 그리고 성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는데, 이제 에갈리아 공동체에서는 모든 것을 정반대로 뒤집어놓았습니다. 여성들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적인 측면에서 남성의 우위에 서 있습니다. 에갈리아 공동체의 힘 있는 여성들은 다음과 같이 항변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의하면 남자가 여성보다 크고 힘이 세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남자가 비이성적 존재로 행세하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힘 있고 목소리 큰 사람이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은 과거의 남성사회에서나 통용될 뿐입니다. 여성들은 남녀의 능력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성에 못지않은 강인한 훈련 그리고 이에 따르는 많은 비용을 지출했는데, 이로써 여성들은 남성과 유사한 강인함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5. 남성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인가?: 그리하여 에갈리아 공동체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보다도 경제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더 약한 존재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물리적 심리적 억압 메커니즘을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즉 “남자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항변합니다. 힘없는 남자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잘하는가? 그들은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감지덕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Brantenberg: 196). 왜냐하면 여성들은 남자 없이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원한다면, 종자를 위한 수컷 몇 마리를 살려놓거나, 정자를 냉동시켜 놓고, 남자들을 다 때려죽일 수 있다고 합니다.
자고로 억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적인 착취이며, 다른 하나는 경제적 억압을 가리킵니다. 어느 남자는 다음과 같이 항변합니다. “그래 여자들은 우리를 이용해 먹어요. 그들은 우리의 노동력을, 우리의 육체를 훔치지요. 우리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해요. 일터든, 부엌이든, 침대든 간에. 온 사회는 모든 남자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지요. 어떠한 여성도 섹스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은 채 남자라는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모든 남성 운동은 여성들에 의해서 성의 폭동이라고 낙인찍힌답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에는 포르노를 감상하려고 이곳에 온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접하는 것은 남자들의 처참한 삶의 모습과 그들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항하는 폭동입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가난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성의 동물로서 여성에게 봉사하기를 강요받고 있지요.”
6.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남성들의 운동, 여성 운동의 배후: 작품의 두 번째 단락에서는 남성 운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억압당하는 남자들이 그들의 권익을 되찾기 위해서 남성 운동을 벌입니다. 모든 질서가 여성에 의해 정해져 있으므로, 남자들은 어떤 집요한 평등 운동을 통해서 그들의 권력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프레토니우스 브렘이라는 남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학교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선생님인 “남자소인” 우글레모제와 함께 어떤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현재 여성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는 시골에서의 노동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일단 모색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지금까지 상실한, 남성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되찾으려고 합니다. 여성들은 특정 PH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남성 운동을 통해서 근본적인 변혁 운동은 어느 측면에 있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를 바꾸어놓지는 못합니다.
7. 민주주의의 아들들, 혹은 평등사회의 딸들: 주인공 프레토니우스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민주주의의 아들들”이라는 소설을 집필합니다. 자신의 쓰라린 경험은 글로 남겨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이 갈구하는 바는 성취되지 않고, 그저 문학 작품 속에 반영되고 있을 뿐입니다. 작품의 제목, “민주주의의 아들들”은 “에갈리아의 딸들”을 모방한 것입니다. 프레토니우스는 남성 사회의 이른바 “정상적인” 언어로 다음의 사항을 묘사합니다. 즉 여성들은 필연적 과정이라 말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어렵사리 구축했지만, 이는 주인공의 견해에 의하면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여성 지배의 에갈리아 사회는 그 자체 완전무결하지 못하며, 몇 가지 특정한 측면에서 어떤 결정적 하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일감은 성 차이가 아니라, 개개인의 특성과 개개인의 능력 차이로 그 성패가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르트 브란첸발히의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즉 사람들은 성의 사회적 역할을 주어진 그대로 지속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여성들은 사회의 모든 중책을 차지하여 지배계급으로 활약하고, 남성들은 청소, 빨래, 요리 등과 같은 가사에 전념하고 자식들을 기우는 식으로 말입니다.
8. 페미니즘 운동의 자기 성찰 작품은 결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거친 페미니스트의 전투적 태도에 대해 작가는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브란첸발히의 작품은 처음부터 정치적 유토피아를 설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항을 전해줍니다. 그 하나는 현대의 가부장중심주의의 삶의 전도된 모습을 희화화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방법론에 있어서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는 페미니즘 운동의 자기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유토피아라고요? 절망적인 남자들의 성도착의 갈망이라고요? 아마도 그렇지 몰라요. (...)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기를 꺾고, 성도착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해 있으며, 성 도착에 빠져 있어요.” (Brantenberg 197).
브란첸발히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긍정적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미의 소설에서 어떤 유토피아의 담론을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떤 바람직한 규범적 사회구성체에 관한 담론을 가리킵니다. 억압당하는 남자들의 고통은 여성의 억압 때문에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제에는 반드시 어떤 합법적이고 이성적인 방안에 의해서 어떤 실마리가 풀릴 수 있습니다.
9. 문제는 성 차이의 극복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가르드 브란첸발히는 작품 속에서 남성 중심주의의 사회를 여성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사회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여성 권력의 가모장주의의 사회가 이전의 가부장주의 사회만큼 제대로 기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뒤집힌다고 해서 여성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사회 내의 모든 삶이 개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의 한 부류가 다른 한 부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게 소설을 통해서 판명된 셈입니다. 성의 역할을 변화시켜 사회 내에 남녀 관계의 권력 구조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사회를 탄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브란첸발히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면, 성의 역할을 바꾸는 것보다도 더 훌륭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작가는 미처 어떤 다른 본질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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