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북구문헌

서로박: (3) 보위에의 "칼로카인"

필자 (匹子) 2023. 4. 12. 10:01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과연 칼의 아내는 그를 사랑하는가? 그런데 칼로서는 사전에 무언가를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 린다에 대한 내적인 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오 칼은 몰래 린다에게 칼로카인을 투여합니다. 린다는 자신의 내적 갈망을 있는 그대로 토로합니다. 자신은 국가가 시키는 대로 “아이 낳는 기계”로 살고 싶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과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미는 자식들과 헤어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칼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린다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미는 남편이 자신에게 칼로카인을 투여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도 린다는 주인공의 약물 투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레오 칼과 린다는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마침내 인지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의 감정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국가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레오 칼의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어떤 연민, 애호 그리고 사랑과 같은 사적인 감정에 함몰된 적이 없었습니다. 사적인 사랑의 삶은 주인공에게는 그저 지엽적인 사항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과업에 따라 충직하게 연구에 몰두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고, 당연한 태도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Jens 2: 1012).

 

17. 체제 비판적인 인간으로 변한 주인공과 그를 탄핵하는 국가: 레오 칼은 자신이 국가의 이념을 충실히 따르는 도구가 아닌가? 하고 뒤늦게 숙고합니다. 자신이 그저 권력의 하수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고통과 해방의 감정이 뒤섞인 심경은 일시적으로 그를 괴롭힙니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칼로카인의 생산과 같은 화학 실험이 아니라, 지금까지 망각하면서 살아온 사적인 삶의 행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를 통해서 주인공은 리센이 무고한 자유인이라고 판단합니다. 자신의 고발로 인하여 리센이 처형당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오 칼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리센이 처형당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합니다. 그러나 리센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터였습니다. 레오 칼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리센을 구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이 와중에서 세계 국가는 우주국가에 의해서 정복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레오 칼은 우주국가 사람들에 의해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세계 국가의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우주국가의 사람들로부터 문초를 당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이 겪었던 모든 사항들을 낱낱이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내 영혼의 환상을 파괴할 수 없다니까. 그럼에도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일조하고 싶은 생각뿐이야.” (Boye: 159).

 

18. 양날의 칼, 칼로카인: 놀라운 것은 칼로카인이라는 마약의 효능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양날의 칼로 기능합니다. 칼로카인은 인간의 내면을 투시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주인공에게는 사회적 진실 내지 자신의 고유한 내면적 사고를 깨닫게 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의사는 칼로카인을 사용함으로써, 최면 요법을 보완하여, 환자들의 심리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은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차원에서 고찰할 때 불순분자를 제거하는 잔인한 무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칼로카인은 인간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마약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작가, 카린 보이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20세기부터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진 국가적 폭력에 관한 사항입니다. 국가의 엄청난 폭력이 출현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국가의 힘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9.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의 차이점,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 보위에의 소설은 그 구도에 있어서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와 흡사합니다. 21세기의 세계국가는 전체주의 시스템으로 개별 인간들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묘사된 미래 국가와 유사합니다. 그렇지만 두 작품에 다루어진 두 사회는 경제적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보위에의 세계국가는 『멋진 신세계』만큼 풍족한 복지사회가 아닙니다. 세계국가의 경제적 생활수준은 몹시 낮지만, 시민의 안전은 의외로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헉슬리의 미래 국가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부를 최대한 만끽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칼로카인』에 등장하는 세계국가 사람들은 유전자의 조작으로 태어나지도 않고, 인위적인 정책에 의해 계층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위에의 세계국가는 우주국가와의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집권층의 독재와 테러가 더욱 강력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헉슬리의 작품에서는 모든 정치적 시스템이 고도의 과학 기술의 활용으로 인하여 몇몇 엘리트들의 손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20. 가정은 없다. 세계국가는 만인을 통솔하기 위해 가정이라는 사회적 하급 체제의 기능을 소멸시켰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면, 자식을 낳기 위해서 공동으로 생활합니다. 그런데 자식의 나이가 5세가 되면, 아이는 교육 공동체로 보내지고 부모와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교육받는 동안 주말에 겨우 부모를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의 나이가 8세가 되면, 아이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 군인 혹은 공무원이 되는데, 죽을 때까지 더 이상 부모와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예외 없이 국가의 소유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특정 부부가 아이들을 8세까지 다 키우게 되면, 부부 역시 그 순간부터 영영 이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자식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체제 파괴적이고 반국가적이며, 사악한 이기주의자로 매도되어 처벌당합니다. 가족의 형성과 해체 등이 가능한 까닭은 세계 국가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사적인 사랑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처음부터 국가에 의해서 철저히 세뇌당해 있습니다. 인간은 예나 지금에나 간에 세계 국가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고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당국의 의도에서 조작된 거짓 망상에 불과합니다.

 

21. 인륜성 그리고 자식들: 인간의 내적 감정은 외부적 영향에 의해서 은폐될 수는 있으나, 결코 파괴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2권에서 다룬 바 있는- 모렐리의 『자연 법전』에 이미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모렐리가 아이들의 교육을 국가에 떠맡김으로써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 사회 국가의 이익이라는 사실을 숙지시키려고 했다면, 보이어의 경우 이보다 더 완강한 내용을 전해줍니다. 만약 사람들이 가정과 가족을 중시할 경우 이는 결국 국가의 이익에 대한 결정적 악재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가정의 결속력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킴으로써 국가의 권익을 더욱더 튼실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가령 레오 칼은 딸, 마릴이 태어났을 때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이는 이전에 아들, 오수가 태어났을 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은 딸 마릴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처절한 비애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내지는 아버지의 정으로 이해되는 것이었습니다. (Boye: 167).

 

22. 국가 이데올로기의 편집광증 (1): 보이어는 모든 삶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의심하고 그에 대해 회의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전쟁과 위기의 국면에 대응하여 추진하는 국가의 병적인 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계국가는 우주 국가로부터 커다란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서 세계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억압하고 그들을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한 뒤에 군인으로 근무하도록 조처했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는 나라의 붕괴에 대한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함으로써 이들을 압박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외부적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누구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국가는 개개인의 죄를 벌할 수 있지만, 개개인이 국가를 탄핵하고 처벌할 방도는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인간들은 전체주의적 권력의 국가에 대해 불안과 압박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항의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의심합니다. 설령 불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인민 스스로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감시체계와 타인에 대한 불신은 시종일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23. 국가 이데올로기의 편집광증 (2): 작품 내에서 세계국가는 “우주국가의 침략”이라는 위기를 일반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세계국가는 그들의 정책이야말로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세뇌시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주권자들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을 무조건 추종하는 군인으로 변모해 있습니다. 주인공 레오 칼은 자신의 상사인 리센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했더라면, 국가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가 형성을 위한 성스럽고도 필연적인 토대는 우리가 서로 불신하기 때문이지요.” (Boye 104f.) 여기서 주인공은 국가의 존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불신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주국가의 침략과 전쟁 그리고 이로 인한 위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쟁과 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대응해야 한다는 위정자들의 편집 광증 내지 국민에 대한 그들의 세뇌 이데올로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자들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을 결국 체제 파괴적인 몽상가로 비판한 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숙청합니다. 그 다음부터 국가는 레오 칼이 발명해낸 칼로카인의 사용에 관해 함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희망 사항 하나를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내적 영혼의 힘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의 폭력하에서도 은밀하게 지속되리라는 희망 말입니다. 이로써 작가는 특정 개인이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랑의 능력 그리고 전체적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에다 일말의 희망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