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북구문헌

서로박: (2) 브란첸발히의 '에갈리아의 딸들'

필자 (匹子) 2024. 1. 3. 17:19

 

 

 

1. 역지사지, 관점 바꾸어 생각하기: 게자 로하임Géza Róheim은 수강생들에게 자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어떤 발언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려고 할 때, 입장을 바꾸어, 즉 반대의 관점에서 그게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세요.” 그는 성 문제로 갈등을 겪는 사람에게 항상 다음과 같이 언질을 주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가 되어 역지사지의 자세로 숙고해보라고 말입니다. 로하임의 강의를 듣던 제자들은 먼 훗날 젠더의 한계를 뛰어넘는 문학 작품을 창조하려 했습니다. 예술작품을 통해서 남성중심주의의 사회를 정반대의 가상 사회로 환치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과 젠더를 정반대의 관점에서 20페이지를 집필하는 동안 그들은 이러한 노력이 재미없다는 것을 절감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저자의 이러한 속임수를 눈치채기 때문이었지요.

 

2. 남성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세상: 이러한 집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설 『에갈리아의 딸들』이 탄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저자의 이름이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라고 소개되었으나, 필자는 스웨덴어의 발음대로 “가르드 브란첸발히”라고 표현하려고 합니다. 작품 발표의 결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대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에갈리아의 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바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은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여성 운동에 대한 억압, 전투적인 남자들의 동성연애 그리고 급진적 남성운동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권 사회의 질서가 작품의 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는 어떤 남성운동의 자생적 발전 그리고 동성연애자들의 자발적 모임에 의해서 비판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3. 가모장 사회와 페니스 보호대: 이야기의 내용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완전히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성처럼 당당하게 살아가고, 남성은 가부장 사회의 여성처럼 구속받으면서 몸을 움츠립니다. 여성이 “움”이라면, 남자는 “맨움”이라고 칭해집니다. “가모장사회”에서 남자는 그만큼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가슴에 브라자를 착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이 바지 속에 “페호”, 즉 “PH 페니스 보호대”를 착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남자의 육체를 지닌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들은 페니스 그리고 고환을 달고 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 남자들은 젖가슴 그리고 풍만한 엉덩이, 찬란한 하복부를 지니지 않은 걸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매달 멘스를 겪지 않는 것을 매우 겸연쩍어 한다. 수염 자체가 수치심을 유발한다. 가슴에 털이 솟아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한다.” (157).

 

4. 동성을 애호하는 사내, 기이한 별종: 주인공은 페트로니우스라는 사내입니다. 그는 하나의 특정한 기관을 다스리는 브람의 아들이며 우글레모스의 제자입니다. 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성적 권한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느 날 페트로니우스는 PH (페니스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때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인공은 여성성이 아니라, 남성성에 탄복하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에갈리아의 궁전에서 거행되는 공공연한 출산 축제 그리고 멘스의 시기에 즈음하여 거행되는 유희입니다. 축제를 통해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어머니가 모든 것을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5. 지배의 도구로서의 언어: 소설은 그 구성과 언어에 있어서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능청스러운 특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름 가운데 “--손”, “--센” 등은 남자 이름의 끝에 첨부되는데, 이 자체가 이미 비하의 의미를 그대로 나타냅니다. 남자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2년 동안 아동 보육을 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남자들의 아동 보육 기간을 2년 이상 연장해야 한다고 데모를 벌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순식간에 관철됩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품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영아들은 아빠의 강건한 육체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은 여성 지배를 관철하게 된 역사적 배경 내지는 원인에 관해서 자세한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작가는 “에갈리아”의 사회에서 남성 지배의 과거사를 언급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고 묘사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 과거에 남성 지배의 사회를 무너뜨렸는가? 하는 과정을 발설하는 것은 위법으로 규정됩니다.

 

6. 성 차이가 근본적인 문제일까? 지금까지 남성중심주의와 이로 인한 여성의 궁핍한 삶에 관한 페미니스트의 문학 작품은 많았습니다. 가부장 주의가 결국에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경고하는 작품 또한 많습니다. 그렇지만 『에갈리아의 딸들』처럼 남성 지배의 사회를 여성 지배의 모습으로 투영시킨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즉 사회 질서를 위한 강력한 힘은 무엇보다도 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냐면 지배를 결정하는 요인은 성의 구분 내지는 차별이 아니라, 생산 관계 내지는 경제적 소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지배의 권한은 경제적 소유라는 권력에 의해 사회적으로 결정됩니다. 쉽게 말해서 더 많은 음식과 돈을 집으로 가져오는 자가 결국 가정의 경제 그리고 가정의 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자들이 더 많은 특권을 지니게 된 근본적 이유 역시 더 많은 재화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성 불평등이 유래했다고 브란첸발히는 믿습니다.

 

7. 빈부 차이와 성 차이: 그렇지만 『에갈리아의 딸들』에서는 상기한 이유에 근거하는 남성의 진화 논리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모장주의의 사회가 존재하면서 남성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여성 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가부장주의 시민 사회보다도 더 훌륭한 생산과 분배의 시스템을 발명하기를 갈망했을까요? 그리하여 남성 지배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로서의 여성 지배의 체제를 마련할 수 있다고 추론했을까요? 아니면 가르드 브란첸발히는 현대 사회가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채 극도의 남성중심주의에 근거한다는 점을 패러디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성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계급 없는 사회를 갈구했을까요? 브란첸발히가 꿈꾸는 세상은 어쩌면 『에갈리아의 딸들』의 세계와는 다를지 모릅니다. 미래의 인간은 같은 권한을 지니고 동등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유사한 존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회 질서 속에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은 결국에 이르면 성의 양극화 현상으로 귀결되듯이, 사회적 양극화 현상의 극복은 필연적으로 성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는 노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를테면 빈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의 공공연한 정책은 결국 성 차이를 극복하려는 정책과 병렬적으로 수행되곤 합니다.

 

8, 평등한 세상에서는 성 차이는 무시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오늘날 중요한 사고로 인정받는 까닭은 21세기의 사회가 여전히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여성 차별 그리고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차별당하고 (성)폭력의 대상이 되며,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는 경우는 당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미래의 사회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중화되고, 젠더를 둘러싼 이슈 자체가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왜냐면 성의 대립이 사라지면, 남성성 그리고 여성성 사이의 구별 역시 줄어들 게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빈부 차이가 사라진 사회는 개인주의 내지는 고립된 삶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삶 내지는 대가족 제도를 권장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완전한 자기 성취는 성의 대결이 아니라, 제도와 의식의 차원에서 남녀평등의 실천 그리고 협동과 배려를 통한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 공동체 운동으로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9. 자유로운 개개인들의 행복한 삶 내지는 자기실현을 이루는 데 있어서 성의 구별이 필요한가? 물론 작가는 작품에서 이 문제를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미는 남성 사회의 비인간적 특성을 역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여성 지배의 사회”라는 문학적 거울을 제시한 셈입니다. 예컨대 『에갈리아의 딸들』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남성 운동”은 오늘날의 여성 운동의 판박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어쩌면 억압당하는 남성들이 스스로 그룹을 형성하고, 폐쇄적 그룹을 형성하는 것은 하나의 패러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오늘날 마초들에 의해서 당동벌이의 집단적 파벌주의로 곡해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남성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편협한 시각도 문제지만, 페미니즘 운동 자체를 남성 혐오로 못 박는 고루한 “한남충”에게 하자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브란첸발히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충격을 안겨주지만, 다른 한편 여성들이 남성중심주의로 인해서 크고 작은 폭력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시인 김혜순의 말대로 여성들은 늘 쫓기는 꿈을 꾸며 생활합니다.

 

10. 집단 이기주의의 폭력: 작품은 다른 관점에서 고찰할 때 폐쇄적 집단 내지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운동이 과연 집단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모든 남자에게 칼을 들이대려고 하는 일부 전투적 펜테질레이아의 사고와 행동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전투적 페미니즘은 역사 속에 수 천 년 전승되어 온 남성들의 끔찍한 폭력에 대한 필연적 저항에서 유래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들의 성 갈라치기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남성에 대한 확증 편향의 시각은 그 차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행동으로 직접 이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페미니즘 운동, 정확히 말해서 에코 페미니즘 운동은 21세기에 이르러 가장 중요한 운동이며 생태 공동체 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페미니즘을 존중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속출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사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이었고, 남성들 가운데 한 명도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지 못했습니다. 이는 몹시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11. 스톡롤름 신드롬: 브란첸발히의 작품은 스톡홀름 신드롬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폐쇄적인 공간을 더 좋아합니다. 숨을 수 있는 곳은 심리적 불안을 떨치게 하니까요. 예컨대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외부의 경찰보다는 납치범을 동정하고 애처롭게 여깁니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에 해당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은 독재자를 추종하는 인민들에게도 엿보입니다. 푸틴과 김정은은 외부의 막강한 적의 위협을 알리면서 인민의 공동 대응을 촉구합니다. 이로써 그들의 권위주의의 프레임은 교활한 보나파르티슴에 의해서 더욱 공고하게 됩니다. 푸틴이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겠다고 우크라이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데도, 60% 이상의 러시아 국민들은 그를 지지합니다. 이러한 기현상은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비 교주, 정명석이 자신의 교회에서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도 신자들은 이를 일시적으로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통해서 해결되기는커녕 그저 은폐되거나, 타자의 잘못으로 이전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 개개인은 가정, 신앙 공동체 그리고 회사 등에서 권위주의의 집단으로부터 유혹을 당하게 되지요.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폐쇄적인 소굴로부터 빠져나와서 해방Exodus의 자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내부 고발자의 발언 – 이것이야말로 비록 우리에게 약간의 고통을 안겨주겠지만, 끝내는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