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내가 결혼하다니? 그미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요? 반대로 한 남자가 두 여자에 대해 동시에 연정을 품는 것은 가능한가요? 사람의 심성에 따라 약간씩 편차가 드러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주어진 정황이 한 인간을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는 것일까요? 20세기 유럽 문학을 대하면 우리는 세 사람 사이의 애정관계를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화 “글루미 선데이 Gloomy Sunday”를 생각해 보세요. 체코의 두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을 반반씩 나누기로 합의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 역시 받아들이는 느낌은 제각기 다르지만, 두 남자에게 공히 어떤 기이한 애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두 남자는 그미를 잃는 것보다는 이분의 일의 사랑이라도 감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 경우 사랑은 기쁨을 동반하지만, 아마도 엄청난 쓰라림을 동시에 안겨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이 다른 인간의 품에 안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주어진 처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부일처제를 고수할 수 없도록 작용합니다. 헝가리의 동화 작가이자 게오르크 루카치의 죽마고우였던 벨라 발라츠 (Bela Balazs, 1884 - 1949)는 1914년에 한 지붕 밑에서 두 여자를 거느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였습니다. 발라츠는 징집의 문제 그리고 경제적으로 심한 고초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나”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은 그를 애호하며 경제적 도움을 자청했던 것입니다.
발라츠는 생존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세 사람 사이의 애정관계ménage à trois”를 맺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문학과 예술 외에도 혁명 운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19년 혁명 공화국을 위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발라츠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두 번째 아내 아나와 함께 헝가리를 탈출하였습니다. (1919년에 간행된 그의 리브레토 모음집에는 독일어로 집필한 네 편의 놀라운 작품들이 담겨 있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벨라 바르톡 Béla Bartók에 의해서 발레곡으로 작곡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동화집은 탄복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고 깊이 있는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사회에도 아내가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애정 관계를 맺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령 신영복 선생의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힘들게 살아가는 빈남빈녀 貧男貧女들의 애환을 서술합니다. 수인 囚人들의 임 가운데 몇몇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남자 (혹은 여자)와 애정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수인들은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바랄 뿐입니다. 임이 다른 사람과 살아도 좋으니, 제발 자신만은 기억해주고 사랑해줄 것을 말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세 들어 사는 삶은 얼마나 가련한가요? 그렇다면 사랑이란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이란 그들에게는 다만 사치스러운 단어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살을 섞는 행위가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실제 현실에서 과연 완전히 실현 가능한 것일까요? 우연히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황지우 시인의 시적 경향과는 상당히 다른 작품입니다. 황지우는 주어진 현실의 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물렁물렁한” 표현 방법으로 묘사하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지닌 시인입니다. 그렇기에 정지창 교수는 황지우 시인을 “노련한 이미지의 넝마주이” 그리고 “탐욕스런 언어의 하이에나”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정지창: 오늘도 걷는다마는, 한티재 2012, 18쪽.) 그처럼 주어진 현실의 상을 시적인 프리즘으로 휘황찬란한 색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이 바로 황지우리고 여겨집니다.
시인은 어디서 사랑하는 그분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처음에 나는 어느 찻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 장소는 하나의 가능한 정황을 시사해줄 뿐, 시적 주제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만일 만해 한용운이 이 이 시를 읽으면, 분명히 찻집이 아니라, 운주사 雲舟寺의 앞마당, 그게 아니라면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던 서대문 형무소를 연상할지 모릅니다.
시적 자아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일단 유보하기로 합시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인용 시에서 사랑을 “어떤 기다리는 마음”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란 시인에 의하면 지금 이곳으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너”를 기다리므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너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자고로 완벽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성취되지 않습니다. 완전무결한 사랑이 어느 누구에게도 충족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만 우리는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어설픈 사랑을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어설픈 사랑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러면서 최소한 사랑의 낙원으로 향하는 노스탤지어의 작은 느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고착되거나 완성되면, 그것은 저절로 사멸하리라고. 따라서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단 하나, 완벽한 사랑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야 말로 황지우가 묘사한 임을 기다리는 마음일 것입니다.
벨라 발라츠 Bela Balazs는 단편소설 「어쩌면 내일 snad zítra」(19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기다림, 바로 그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 사랑은 너에게 완전히 다가가지 않고, 약간 물러서서 너를 오랫동안 애타게 바라보는 조바심일지 모릅니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너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너무 다가가면, 네 감성의 가시는 나를 찔러 피를 흘리게 할지 모릅니다.
사랑은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기 위한 노력, 아니 임의 안녕을 위해서 스스로 돌아서는 행동일지 모릅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시드니는 사랑하는 루시의 안녕을 위하여 친구 샤를에게 그미를 맡기고 단두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로써 그는 한편으로는 임의 안녕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결한 인간성을 입증해내지 않았던가요?) 그래, 사랑하는 마음은 완전함에 다가가려는 끝없는 노력입니다. 사랑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내 가슴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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