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리는 네 눈의 윙크
흘러내리는 네 어깨의 머리카락
가을 강물을 흔드는 바람아 끈적끈적하잖니
흘러드는 내 귀의 노래
흘러드는 내 손가락 사이의 설탕물
끈적끈적 채웠으니 시절아, 따라갈까 불어갈까
저 입이 움켜진 군침
밀크와 딸기가 섞인 백 개의 강이 흐르고
채워지지 않은 입은 저 둥근 허공을 쪽쪽 빨고 있는데
화공 (畵工)은 어딜 갔다니,
달콤한 혀로 천 개의 침을 찍어
노는 물결 위에 한생을 그리고 그려야 하는데
오, 살랑대는 추파 (秋波)
춥스! 이제 곧 앙상한 겨울 막대만 남을 텐데
가까스로 가을인데
정끝별의 시집 "와락" (창비 2008)에서
봄은 물이고, 여름은 불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모든 생명체는 더 이상 먹이 걱정을 하지 않으며, 사랑과 짝짓기에 열중한다. 가을은 바람이고, 겨울은 흙이다. 가을이 오면 서서히 추워지고, 바람은 낙엽을 쓸어간다. 그 아래에서 산책하는 자들은 지나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린다. 정끝별의 시 「추파, 춥스」는 지나간 사랑의 열정과 가을의 허전함으로 뒤엉켜 있는 작품이다. 추파는 가을바람이 연주하는 파도의 동의어나 다름이 없다. 임의 눈빛과 머리카락은 마치 “가을의 강물”을 흔드는 것처럼 일렁거린다. 시인은 이를 끈적끈적함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나간 사랑의 속삭임, 열정으로 인한 땀 그리고 체액 등을 유추하기 때문이다.
바람은 이 모든 과거의 (혹은 현재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아쉽게도 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입" 속의 "군침"에서 암시되듯이 이 순간 시적 자아는 언젠가 연인과 함께 먹던 달콤한 “밀크”와 “딸기” 섞인 아이스크림을 기억해낸다. 이는 지나간 추억의 설레는 장면이지만, 마치 호수와 같은 가슴 속에 파문을 일으키며 튕겨 나가는 아쉬움과 허망함의 돌멩이가 아닌가? 하기야 우리는 누구든 간에 더 많은 열정, 더욱 강렬한 욕망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사랑을 갈구하고 이를 완성시키려는 시도 - 그것은 어쩌면 평생 동안 한 편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지고의 노력일지 모른다. 이는 시의 제 4연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영원히 사랑을 나눌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고, 서서히 늙은 다음에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을의 바람이 어찌 오로지 지나가는 시간과의 관련 속에서만 이해되어야 하는가? 추파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한 명의 파트너에 전적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는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가 초기에 발표한 논문 「일부일처로 인한 성의 둔감화 현상으로 인하여」에서 자세히 설명된 내용이다. 아니 굳이 라이히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라 하더라도 평생 함께 살면서 상대방에 대해 싫증을 느낄 때가 있다. 비근한 예로 TV를 시청하는 동안, 우리는 자주 채널을 돌리곤 한다. 더 재미있고 더 유익한 프로그램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식당에 앉으면 항상 남의 밥그릇이 더 맛있게 보이고, 다른 부부들의 삶이 우리 부부의 삶보다도 더 행복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언제나 현재의 순간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인간 치고 영원한 임, 완전한 사랑을 꿈꾸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도 영원한 사랑은 지금 이곳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영원한 사랑 그리고 완전한 사랑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일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이따금 “바람”을 피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무의식적으로 관습 도덕 그리고 법으로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게 바로 추파, 즉 가을의 바람이 지닌, 또 다른 함의가 아닐 수 없다.
미혼인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의 애인이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결혼하면, 한편으로는 사랑의 성취감을 맛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실망감 내지 성취의 우울에 휩싸이기도 한다. 물론 부부에 따라 이러한 강도는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여배우를 죽도록 사랑하던 헥토르 베를리오즈의 실망감을 생각해 보라. 어느 유부남, 혹은 유부녀는 어느 순간 파트너에게 싫증을 느낀다. 그때 외도를 꿈꾸면서 죄의식을 느낀다. 과거에 꿈꾸던 사랑이 혼인을 통하여 100퍼센트 성취되지 않았다는 게 이를 자극한다.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인, 혹은 꽃미남에게 순간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는 이를 실천하기가 몹시 껄끄럽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춥스.”하고 아쉬움을 드러낸다. 가을의 바람 속으로 더 이상 잠입하기란 이제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주위의 여건은 차가운 바람으로써 그들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리비도를 자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열정을 꽁꽁 묶게 하는 외부의 냉혹한 분위기를 상징한다. “이제 곧 앙상한 겨울 막대만 남을 텐데/ 가까스로 가을인데”, 더 큰 사랑, 더 큰 자유를 위한 외도는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 등의 제약으로 인하여 중단될 수밖에 없다. 정끝별의 작품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현대인의 마음속에 도사린 설렘을 가장 멋지고 기발하게 표현한 연애 시라고나 할까? 이 작품은 더 강렬한 사랑을 갈구하려는 현대인의 내적인 욕망 그리고 시간적 이유 및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하여 끝내 성취할 수 없는 아쉬움 등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독일어로 “취스 Tschüß”라는 단어는 친구들이 헤어질 때 던지는 말이다. 이 단어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 나는 “키스”를 연상했고, 헤어짐보다는 재회에 대한 기약의 의미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추파 역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을지 모른다. “남의 애인”에 대한 순간적인, 그러나 강렬한 애정 표현. 그러나 “춥스” - 이러한 애정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우리는 추파를 던지다가도 즉시 입을 다물며, “안녕”하고 헤어짐의 인사를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관습, 도덕, 법이라는 사회적 장애물 외에도 우리는 사랑 (불륜)으로 인한 수많은 고통과 좌절을 예측하면서 이를 모조리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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