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5가
신동엽
밤 열한시 반
종로 5가 네 거리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통금(通禁)에
쫓기면서 대폿잔에
하루의 노동을 위로한 잡담 속
가시오 판 옆
화사한 네온 아래
무거운 멜빵 새끼줄로 얽어맨
소년(少年)이, 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다.
충청남도 공주 동혈산(銅穴山)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소년(少年)의 눈동자가
내 콧등 아래서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들고
바삐바삐 지나가는 안파에
밀리면서 동대문(東大門) 을
물었다,
등에 짊어진
푸대자루 속에선
먼길 여행한 고구마가
고구마끼리 얼굴을 맞부비며
비에 젖고,
노동으로 지친
내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소년(少年)은 보이지 않았다.
........................
이 작품은 신동엽 시인이 1967년에 발표한 서사시 "금강"의 후기에 실린 것입니다. 도시와 시골, 서울 밤을 수놓는 대기업의 네온사인과 바삐 귀가하는 노동자들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통행 금지가 사라졌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당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묻던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당신이 젊은이라면, 소년은 혹시 지금 당신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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