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신동엽의 시, '종로 5가'

필자 (匹子) 2023. 11. 14. 06:50

종로 5가

신동엽

 

밤 열한시 반

종로 5가 네 거리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통금(通禁)에

쫓기면서 대폿잔에

하루의 노동을 위로한 잡담 속

가시오 판 옆

화사한 네온 아래

무거운 멜빵 새끼줄로 얽어맨

소년(少年)이, 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다.

 

충청남도 공주 동혈산(銅穴山)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소년(少年)의 눈동자가

내 콧등 아래서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들고

바삐바삐 지나가는 안파에

밀리면서 동대문(東大門) 을

물었다,

 

등에 짊어진

푸대자루 속에선

먼길 여행한 고구마가

고구마끼리 얼굴을 맞부비며

비에 젖고,

 

노동으로 지친

내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소년(少年)은 보이지 않았다.

 

........................

 

이 작품은 신동엽 시인이 1967년에 발표한 서사시 "금강"의 후기에 실린 것입니다. 도시와 시골, 서울 밤을 수놓는 대기업의 네온사인과 바삐 귀가하는 노동자들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통행 금지가 사라졌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당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묻던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당신이 젊은이라면, 소년은 혹시 지금 당신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