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현대불문헌

서로박: (3)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필자 (匹子) 2023. 8. 24. 10:30

(앞에서 계속됩니다.)

 

13. 서구의 계몽주의는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디포의 작품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배가 난파한 연도는 1659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디포의 작품과는 달리 소설의 시점을 정확히 100년 뒤인 1759년으로 설정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지배 구조, 다시 말해서 유럽과 제삼세계 사이의 종속 구조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야생에 대한 서구 문명의 착취는 바로 계몽주의의 시대인 18세기 중엽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작가 투르니에는 문명과 야생의 가치가 처음부터 전도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했을까요?

 

작품 속에서 주인공 로뱅송은 처음에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연을 이용하고 분할시키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중에서는 열대의 자연에 매료되어 이전에 품었던 모든 서구적 갈망을 포기합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은 남태평양의 무인도에서 땅을 개간하고 재화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자연 환경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이 와중에서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하나의 법칙을 만드는 등 자신의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투르니에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노력이 그저 무모하고 어긋난 행동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입니다.

 

14. 서구의 기독교 문명은 생명체에게 자연스러운 성적 욕망을 억압하게 했다.: 로빈슨은 성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불안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소설의 주인공, 로뱅송은 성적인 쾌감을 통해서 자연의 무의식적 위협을 예리하게 인지합니다. 자연은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연이 부여하는 오르가슴에 극도로 매혹됩니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문명인으로서 자연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결국에 이르러 자연이 제공하는 쾌락이라는 축복의 늪에 푹 빠지게 됩니다. 로뱅송은 낯선 지역에서 인간의 문명을 바로 세우고 이를 키워나가려고 했으나, 자연의 심원한 공간 속에서 기상천외한 성적인 황홀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방드르디를 대하는 데에서도 반복됩니다. 로뱅송은 처음에는 방드르디를 무시하고 밀쳐 내려고 했으나, 나중에는 그에게서 새로운 무엇을 배우면서, 스스로 자연 친화적이고 성적 차원에서 성숙한 인간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15. 작품의 서술 방식: 다니엘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모든 것을 “나”라는 일인칭의 방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의도적으로 삼인칭의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3인칭의 서술은 주지하다시피 작가가 등장인물에 비판적인 거리감을 취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로써 드러나는 것은 어떤 냉정한 객관적 관찰 방식입니다. 그런데 투르니에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일기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일기는 보다 다양한 문학적 기능을 드러냅니다. 작가는 일기 형식을 통해서 비판적 관점에서 주인공 로뱅송에 대한 운명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습니다.

 

16. 주인공의 관점과 세계관의 변화 (1):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관점과 세계관이 -일기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서서히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개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게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Hauptmann의 중편소설 「소아나의 이단자Ketzer von Soana」 (1917)라는 중편소설입니다. 주인공 프란체스코 펠라는 몬테 게네로스라는 지역에서 아가타라는 이름의 천진난만한 처녀를 만납니다. 이때 프란체스코는 수사로서의 모든 계율을 저버리고 오로지 아가타와 함께 자연 친화적 삶을 이어가기로 결심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 속의 순진무구한 여성성이 그를 더이상 수사의 삶을 살지 않도록 방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열대의 야생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심원한 “토본주의chthonism”의 여성성이 한 인간의 삶을 마구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17. 주인공의 관점과 세계관의 변화 (2): 두 번째는 귄터 아이히Günter Eich의 방송극 「꿈Träume」 (1951)의 다섯 번째 장 가운데 네 번째 장입니다. 안톤과 바실리는 자연 탐험가로서 아프리카 정글에서 식물을 탐사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두 사람은 “망각의 풀”을 뜯어먹은 다음에,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무슨 일을 행하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심지어는 언어 능력도 상실하여 결국에는 정신을 잃게 됩니다. 아이히는 방송극에서 그저 몇 마디로써 이들의 실종을 암시할 뿐입니다. 특히 아이히의 방송극은 “암흑의 심장부” (조셉 콘래드)와 관련되는 주제를 다시금 되새기게 합니다, 등장인물 안톤과 바실리는 아프리카의 오지(奥地)에서 59억 년 이상 전승되어 온 자연사의 모든 비밀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180 만 년 전부터 시작된 홍적세의 시간보다도 더 오래된 지질학적 암흑의 비밀이었습니다.

 

18. 야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렇듯 야생의 본질적 의미는 인류가 살아온 홍적세의 시간을 건너뛰어서 지구가 생성되어온 지질학적 어두움 속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아프리카 열대 지역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아마존 지역은 단순한 야생의 열대 지역이 아니라, 동식물 이전의 광물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야생의 현실이 얼마나 어두움 속에 가려져 있는지를 암시하게 합니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소설, 『암흑의 심장Heart of Darkness』 (1899)에서 이러한 놀라운 진실의 단초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열대 지역은 암흑의 심장부로서, 문명인이 감히 범접할 수도, 정복할 수도, 단선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는 하나의 심원한 공간이며, 어두운 토양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도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1955) 제5장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야생의 역사는 인류사의 그것과는 달리 변증법적 이성으로 추적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19. 문명과 야생은 우월을 가릴 수 없는 영역이며, 싫든 좋든 간에 상호 영향을 끼치는 두 개의 고유한 영역이다.: 다시 투르니에의 소설로 돌아가겠습니다. 로뱅송은 스페란차 섬에 홀로 살아가다가, 지금까지 자신이 품었던 모든 서구의 사고를 저버리고, 자연에 순응하기로 작심합니다. 사람들은 투르니에 소설의 주제를 처음에는 단순히 문명 비판의 관점에서 밝히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구와 열대, 문명과 야생이라는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이 작품을 추적해야 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작가는 자연에서 야생의 흔적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서구 문명이 상실한 인간의 무의식적 행복을 새롭게 탐색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문명의 서구는 야생의 열대 지역이라는 동전의 뒷면에 불과합니다. 열대 지역의 자연은 문명에 의해 일방적으로 활용되는 야생의 처녀지가 아니라, 서구 문명이 새로운 각도로 배우고 수용해야 하는 생명의 심원한 원천,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로뱅송”도, 방드르디도 아닌, “스페란차 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근원은 희망을 뜻하는 “스페란차” 섬, 열대의 여성성,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칠레 나무에 패여 있는 부드러운 “구멍”으로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