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현대불문헌

서로박: (1) 치카야 우 탐시의 삼부작 '바퀴벌레'

필자 (匹子) 2023. 9. 7. 16:35

"아프리카의 내전은 본질적으로 세계대전이다." (이종찬: 열대의 서구, 朝鮮의 열대,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6, 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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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까만 눈동자에 맺힌 눈물: 콩고는 오랫동안 서구의 식민지로 억압당했습니다. 18세기부터 서구인들은 콩고 왕국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백인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서구인들은 콩고인들에게 성서와 서양 의학 그리고 과학 기술을 전파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것들이 서로 주고받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식민주의자들의 착취가 시작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수십만이 차출되어 노예 선을 타고 신대륙으로 떠났습니다. 19세기 초부터 아프리카 땅 전체가 서구인들의 식민지로 변했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1877년부터 벨기에 군인에 의해서 짓밟혔습니다.

 

1885년부터 1903년까지 자유를 되찾는듯 했지만, 풍요로운 땅 콩고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다시금 전락하게 됩니다. 콩고가 독립 국가로 거듭나게 된 시점은 1960년이었습니다. 1990년부터 약 10년간 외세의 갈등과 맞물려서 동족끼리 내전을 치렀습니다. 내전을 배후에서 조종한 열강의 세력을 고려하면, 콩고의 내전은 한국의 625사변을 방불케 합니다. 당시에 벨기에와 포르투갈이 양 진영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콩고는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어 있으며, 동부 지역에서 호시탐탐 현 정부의 체제를 뒤엎으려 하고 있습니다. 콩고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와 매우 비슷합니다.

 

2. 치카야 우 탐시는 누구인가?: 오늘은 콩고 출신의 작가, 치카야 우 탐시 (Tchicaya U Tamsi, 1931 – 1988)의 삼부작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의 본명은 제랄드 펠릭스 치카야인데, 자신의 이름을 “우탐시”라고 명명했습니다. “우탐시”는 “조국의 대변인”이라는 함의를 지닌다고 합니다. 치카야는 콩고의 푸앵트누아르에서 유년을 보냈습니다. 푸앵트누아르는 대서양에 인접한 항구도시입니다. 프랑스는 항구로부터 적도(赤道) 아프리카 식민지의 중심 도시인 브라자빌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맨 먼저 사회적 간접자본을 확충하였습니다. 이로써 콩고 강(江) 상류와 내륙지방이 대서양과 연결되었습니다. 1946년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전공하여 훌륭한 판사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그는 저항적인 성격 때문에 작가의 길을 걷습니다. 1960년 그의 나이 29세가 되었을 때 다시 고향인 브라자빌로 되돌아옵니다. 식민지, 가난, 폭정 등은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 파트리스 루뭄바가 살해되다: 그가 프랑스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이 오랫동안 흠모했던 정치가 파트리스 루뭄바 (Patrice Lumumba, 1925 – 1961)와 연대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파트리스 루뭄바는 벨기에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방식으로 독자적인 콩고 공화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지혜로운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는 지식인으로서 1960년 6월부터 9월 5일까지 콩고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콩고는 공화국으로서의 토대를 독자적으로 세웠지만, 정국은 여전히 어수선했습니다. 명목상으로 독립했지만, 나라의 경제적 토대는 외세의 식민지 구도를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콩고는 남한의 23배나 되는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땅입니다. 동식물, 목재 그리고 풍부한 광물 자원 등은 벨기에와 포르투갈 사람들의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에 콩고는 두 개의 세력에 의해서 카탕카 주 그리고 카사이 주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카탕카 사람들은 통일 지향적인 정치가 파트리스 루뭄바를 체포한 다음에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로써 콩고는 정치적으로 다시금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치카야 우 탐시는 파트리스 루뭄바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폭력의 방식으로 난국을 수습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공표합니다. 그는 작가로서 사회의 진보에 이바지하기로 작심합니다. 자신의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식민 사업, 인종 차별 그리고 크고 작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척되었습니다.

 

4. 올바른 일에는 협동과 연대가 필수적이다. 치카야 우 탐시는 창작 외에도 많은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는 1961년부터 파리의 유네스코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젊은 아프리카 문인들의 창작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치카야는 아프리카 재단을 설립하여, 사비를 털어서 아프리카 전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낸 것은 치카야 우 탐시 문학상입니다. 재단은 현재 모로코에 자리하고 있는데, 2년에 한 번씩 유능한 작가에게 문학상을 수여합니다. 이를 위해서 치카야 우탐시는 2년에 한 번씩 모로코를 방문했습니다.

 

오늘날 콩고 시인들은 치카야 우탐 시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의 머리에다 추악하게/ 외칠 때 그는 성숙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지 언제나 미소 지으며 온화하게 행동하고/ 첨예한 눈물의 거대한 나무를 갈구하고 있었지 그건 오로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 황량한 맹금들이 앞뒤로/ 서성거리는 땅이었지.”( Arlette Chemain-Degrange und Roger Chemain, De Gérald Félix Tchicaya à Tchicaya U'Tam'si : hommage, Paris, L'Harmattan, 2009, 502 S).

 

6, 치카야 우 탐시의 삼부작: 첫 번째 작품 『바퀴벌레 Les Cancrelats』는 1980년에 발표되었으며, 두 번쩨 작품, 『해파리와 바다 쐐기풀Les Méduses ou Les orties de la mer』은 1983년에, 세 번째 작품 『나방Les Phalènes』는 198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작가는 여기서 아프리카인의 시각, 그것도 가장 낮은 사회 계층의 측면에서 근대 이후의 중앙아프리카의 슬픈 역사를 생동감 넘치게 서술합니다. 세 작품은 제각기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같은 인물이 반복되어 등장하고 작품의 시간과 장소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닙니다.

 

첫 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인공, 프로스퍼의 아버지, “톰 는투투”입니다. 그는 –작가와 유사하게- 프랑스, 미국 그리고 상아해안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고향인 콩고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백인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는데, 옷 만드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재단사로 일하면서 자그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콩고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어서 톰에게는 아프리카의 삶 자체가 속박으로 다가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 차 있으며, 모든 재화는 백인들에 의해 착복되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