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3. 헨리 반 다이크의 네 번째 동방박사: 미셸 투르니에는 집필 중에 두 편의 작품을 참고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소설가 헨리 반 다이크 (Henry van Dyke, 1852 – 1933)의 「다른 현자의 이야기The Story of the Other Wise Man」 (1996)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 명의 동방박사를 거론하지만, 사실은 네 명이라고 합니다. 반 다이크는 짤막한 단편 소설을 통해서 세인에게 전해지던 네 번째 동방박사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아르타반이라는 이름의 동방박사는 뒤늦게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됩니다. 아기 예수를 위해서 아르타반은 홍옥, 청옥 그리고 진주를 선물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도중에 불행한 사람을 만나, 그를 도와주느라고 너무나 오랜 세월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홍옥과 청옥을 팔아야 했습니다. 거의 30년이 지난 시점에 아르타반은 뒤늦게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이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골고다로 달려가는 길에서 아르타반은 다시 불행한 사람을 만나 마지막 선물인 진주를 탕진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안타깝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았습니다. 아르타반은 절망에 사로잡혀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맙니다. 이때 그 지역에 지진이 발생합니다. 아르타반은 날아온 기왓장에 머리를 맞아서 즉사하고 맙니다. 이때 야훼신은 이웃을 위해 봉사한 아르타반의 마음을 갸륵하게 여기고 그를 구원해줍니다.
14. 사퍼의 네 번째 동방박사: 이러한 사항은 또 다른 문헌에서 유사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작가 에자르트 샤퍼 (Edzard Schaper, 1908 – 1984)의 『네 번째 동방박사Der vierte König』입니다. 이 작품은 1961년에 뒤늦게 쾰른에서 간행되었습니다. (Edzard Schaper: Der vierte König. Ein Roman. Hegner, Köln 1961). 등장인물은 젊은 러시아의 제후 바니카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도중에 여러 고초를 겪어서 30년 후에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시점은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뒤였습니다. 그런데 바니카의 오랜 방랑 생활은 작가 에차르트 샤퍼의 고행을 방불케 합니다. 실제로 샤퍼는 1944년 자신의 식솔을 데리고 핀란드를 거쳐서 스웨덴으로 도주했는데, 스웨덴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어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그가 겪은 추방, 도주 그리고 감금은 네 번째 동방박사의 편력과 흡사합니다. 말하자면 샤퍼는 이른바 “수난의 경험eine Passionserfahrung”을 동방박사의 이야기로 꾸며낸 셈입니다.
15. 소설 속에 등장하는 네 번째 동방박사: 작가 투르니에는 네 번째 동방박사를 다르게 묘사했습니다. 예컨대 타오르는 체질적으로 사탕과 과자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어린 시절 “피스타치오를 곁들인 라바트 루쿰Rabat lukum aux pistaches”이라는 프랄린 제조법을 배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프랄린은 견과류와 크림, 술, 버터, 초콜릿 등으로 속을 채우고 플레인 초콜릿을 가리킵니다. 최근에 타오르는 어느 비밀스러운 제과점에서 베들레헴에서 놀라운 요리사가 태어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가족이 멀리 떠났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그에게 프랄린 제조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를 위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청해서 걸어야 한다고 작심합니다. 타오르는 일부러 어느 도둑의 죄를 뒤집어쓰고, 무려 30년 동안 소돔의 소금 광산에서 일합니다. 타오르가 수용소를 벗어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수소문했으나, 예수와 그의 제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오르는 오랜 고행의 과정 끝에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도 가장 달콤한 음식을 만끽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여 성찬식의 예식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인 포도주와 과자를 누구보다도 먼저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16. 동방박사들은 선물을 바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소설 『가스파르, 멜키오르 그리고 발타사르』는 내용상으로 한편으로는 기독교 사상을 다루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박사에 관한 전설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작가는 네 명의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기독교 정신이 참된 사랑 (유향), 진리와 치유 (몰약)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권세 (황금)을 알려준다고 말합니다. (1) 진정한 사랑은 이웃을 자신의 존재처럼 아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2)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진리를 깨닫고, 갈등을 해결하며 치유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3) 진정한 권세는 세속적 권력이 아니라 사랑의 공산주의를 실천하게 하는 용기와 관련됩니다.
또 한 가지 사항은 네 번째 동방박사의 선물이 뜻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투르니에에 의하면 진정한 기쁨과 인생의 단맛 (프랄린)을 가리킵니다. 유향, 몰약, 황금 그리고 프랄린은 그리스도가 전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네 명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자신의 원래의 의향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카스파르는 유향을 바치면서 에로스를 포기하고 아가페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발타사르는 예수에게 몰약을 바치면서, 스스로 기독교의 참된 의미와 예술 정신을 감지하게 됩니다. 멜키오르는 황금을 바치면서 지배욕을 저버리고 그리스도 공동체를 결성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타오르는 프랄린 제조법을 포기하고,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를 맛보게 됩니다.
15. 소설의 현실적 맥락: 둘째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항은 작품의 배경으로 채택된 현실이 몹시 시적 맥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담론의 질서L’ordre du discours』 (1971)에서 현대성을 논의할 때 동방박사의 기도를 개괄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자고로 하나의 텍스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원래의 의미는 퇴색해지고, 텍스트의 해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수많은 의향을 수용함으로써 독자에게 그야말로 복합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안겨주곤 합니다.
작가는 어쩌면 수많은 버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하나의 가능한 현실적 맥락 속에 담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작가가 선택한 전지적 화자는 하나의 규범적 텍스트 자체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는 하나의 규범적인 의미만을 전해주는 게 아니라, 다원적 측면에서 서술됨으로써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서술 방법은 프랑스의 누보로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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