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박설호: (3) 캄파넬라의 옥중 시편

필자 (匹子) 2022. 12. 15. 11:24

(앞에서 계속됩니다.)

 

너: 이에 관해서는 오랜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이번에는 시집에 관해서 언급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어떻게 시집이 간행될 수 있었는지요? 제가 알기로는 1622년에 그의 시집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간행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시기에 그는 나폴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지 않았나요?

: 네. 시집이 간행된 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1612년은 캄파넬라가 나폴리 교도소에 수감된 지 12년 째 되는 해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독일의 인문학자이며 법률가인 토비아스 아다미 (Tobias Adami, 1581 – 1643)는 자신의 제자와 함께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는 작센의 귀족이며 나중에 군주가 되는 제자, 루돌프 폰 뷔르나우와 함께 그리스, 예루살렘 그리고 몰타를 여행한 뒤 나폴리에 잠시 체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곳의 교도소에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가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폴리 감옥을 찾아가서 그와의 면회를 요청합니다. 아다미는 자신의 인문주의자 서클에서 캄파넬라의 명성을 이미 접한 바 있었습니다.

 

너: 당시에 정치범과의 접견이 가능했을까요?

: 어떻게 면회가 가능했는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간수에게 약간의 뇌물을 건넸는지, 그게 아니라면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를 교묘하게 활용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다미가 1612년에 나폴리 교도소로 가서 토마소 캄파넬라와 접견했다는 사실입니다.

 

: 바로 이때 캄파넬라의 중요한 문헌들이 아다미라는 학자에게 전해진 것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이때 캄파넬라는 자신이 쓴 철학 시편들과 다른 글들을 아다미에게 몰래 건네줍니다. 원고 가운데에는 놀랍게도 캄파넬라의 명작 『태양의 나라』도 섞여 있었습니다. 아다미는 친구인 요한 야콥 안드레에Andreae에게 캄파넬라의 시작품 그리고 다른 문헌을 보여주면서 출판에 관한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기술된 캄파넬라의 철학 시집은 1622년에 아다미에 의해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간행하였습니다. 당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30년 동안 전쟁을 치르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책이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놀랍습니다.

 

: 캄파넬라의 시편을 소개해주시지요. 그의 시는 사상시 내지는 “철학의 시”로 분류되고 있는데, 때로는 각운이 파괴되는 것으로 미루어 시 형식에 맹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적 이미지 내지 표현 등으로 미루어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요?

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캄파넬라의 시는 주로 소네트와 (이탈리아의 종교시에 해당하는) 마드리갈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캄파넬라의 시 작품을 많이 소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두 편을 선정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시는 「나 자신에 관하여 Di se stesso」입니다.

 

“묶여 있든 풀려 있든, 함께 있든 혼자 있든

외치든 침묵하든, 나는 자만하는 자들을 당황케 하리라:

내 모습 속된 인간의 눈에는 광인으로 보일 테지만,

북극 위의 신의 정신에게는 현자로 비치리라

 

천국으로 향해 날개를 펼치리라, 지상에 묶여 있는 자,

육체는 처절한 고통으로 괴로워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쁘구나:

이따금 중력은 나 또한 마냥 내리 누르지만,

날갯짓은 나를 딱딱한 지상 위로 솟아오르게 하니까.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은 누가 옳은지 가려낼 것이고,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라도 언젠가는 영겁 속에 사라지겠지.

내가 짊어지고 가려는 짐은 결코 무겁지 않아.

 

내 사랑의 모습 이마 위에 찬란한 빛을 발하니까,

시간은 반드시 나를 어떤 밝은 곳으로 데려 가겠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 고스란히 이해되는 그 장소로.“ (필자 역)

 

(Sciolto e legato, accompagnato e solo,/ gridando, cheto, il fero stuol confondo:/ folle all’occhio mortal del basso mondo,/ saggio al Senno divin dell’ alto polo.// Con vanni in terra opressi al Ciel men volo,/ in mesta carne d’animo giocondo;/ e, se talor m’abbassa il grave pondo,/ l’ale pur m‘alzan sopra il duro suolo.// La dubbia guerra fa le virtù cónte./ Breve è verso l’eterno ogn’altro tempo,/ e nulla è più leggier ch’un grato peso.// Porto dell’amor mio l’imago in fronte,/ sicuro d’arrivar lieto, per tempo,/ ove io senza parlar sia sempre inteso.)

 

: 자기 성찰 그리고 치유를 위한 소네트로군요, 오로지 신만이 자신을 “현자”로 인정해주실 것을 시적 화자는 갈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로군요. 여담이지만 친구 한 명이 언젠가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하더군요.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빽” 밖에 없다고.

: 재미있네요, 캄파넬라는 32세의 나이에 나폴리 감옥의 불과 네 평 남짓한 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캄파넬라는 30의 입신 나이에 끔찍한 불행을 체험해야 했군요.

: 캄파넬라는 1602년부터 틈만 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캄파넬라는 종신형의 선고를 받았으므로, 언제 자유의 몸이 될지 몰랐습니다. 그를 지탱시켜준 것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믿음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글쓰기,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캄파넬라가 처한 정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군요

: 지상에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인간이라고는 한명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캄파넬라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따르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하나의 신조로 여겨 왔습니다. 비록 텔레시오의 광학에 관한 이론이 영혼 불멸설을 불신하게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믿음의 공간마저 모조리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캄파넬라는 젊은 시절에 항상 자만하는 자를 경고하고, 수미일관 잘못된 생각을 지닌 자를 계도해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치르는 동안에 세인들의 찬사를 기대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신으로부터 현자라는 칭송을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너: 특히 제 2연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아요, 세상의 어느 누구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없었던 시적 자아는 비록 “중력”을 느끼지만 하늘 위로 날아오르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프로메테우스, 아니면 이카로스의 열망으로 이해될 수 있겠군요,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