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박설호: 강덕경, 혹은 알렉산더 미처리히 (3)

필자 (匹子) 2022. 5. 9. 11:09

11. 두 세대 그리고 세대 차이: 미처리히는 독일인을 두 세대로 나누어서 해명합니다. 첫 번째 세대는 나치 독재에 직접 가담한 전쟁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싫든 좋든 간에 내면에 최소한의 죄의식을 품고 있습니다. 히틀러를 직접 선거로 선출한 자들도 이들이며, 유대인 탄압에 동조한 자들도 이들입니다. 설령 히틀러에 저항하는 지조를 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한스 숄 남매Hans Scholl Geschwister가 뮌헨 전역에 뿌린 삐라는 모두 경찰서에 수거되었던 것입니다. 전쟁 세대는 근면, 검소를 생활신조로 삼으며,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세대는 전쟁 이후에 태어난 자들로 68 학생운동 세대입니다. 이들에게는 나치 폭력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세대 사이에 견해 차이 내지 갈등이 마치 깊은 골처럼 패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들이 억울하게 피해 의식을 지니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반대로 기성세대는 68 세대를 “부모의 도움으로 편하게 젊은 시절을 보낸 다음에 철없이 앙탈을 부리는 신경증 환자”라고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경제적 도움이 없었더라면, 삶이 몹시 피폐해졌을 것인데, 젊은이들은 이러한 은덕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2. 망각을 통해 상실하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비판적 판단력, 현실 감각의 상실, 이상, 양심: 예컨대 일반 사람들은 과거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에는 권위주의적인 자세로 권력에 맹종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다수의 독일인들은 미처리히에 의하면 공동적 영혼을 지배하는 에너지를 거부하거나, (예컨대 지도자로서) 이상화된 객체로부터 등을 돌린다고 합니다. 역사를 거부하는 행위, 과거 파시즘의 죄악으로부터 등을 돌리려는 태도 등은 기억 상실증의 가장 본질적 수단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일본인들은 자신의 역사서에서 임진왜란을 침략 정책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 무력 도발을 삭제하고, 중국과의 교역 과정의 일환에서 발생한 하나의 작은 마찰에서 비롯하는 전쟁이라고 언급할 뿐입니다. 이로써 은폐되는 것은 수만, 수십만의 조선인들에 대한 살육 행위였습니다. 물론 현대인의 심리는 백년 오백년 이전의 사건 내지 과거에 충동에 의해서 이리저리 이끌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과거 사실이 아니라, 눈앞의 당연한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현재의 현실이 과거의 역사와 결착되어 있음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합니다. 자고로 현재의 현실의 근본문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 과정은 모조리 인과율에 의해 점철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역사적 사건 속의 기본적 인과론을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문제를 애써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자가 현재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난제의 근본 사항을 정확히 파악할 리 만무합니다. 이로써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양심의 구도 역시 왜곡되고 체제 옹호적 편향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아의 고유한 비판적 판단력 그리고 자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상 등은 일그러져 버린다고 미처리히는 설명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적 망각이라는 신드롬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현실 감각의 상실, 왜곡된 양심 그리고 비판적 판단의 부재 현상을 낳으며, 이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칩니다.

 

13. 국수주의와 반공주의의 탄생: 알렉산더 미처리히는 1963년에 「아버지 없는 사회의 길에서Auf dem Weg zur vaterlosen Gesellschaft」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가치, 규범, 전통의 파괴 등을 언급하면서 주어진 현재의 독일 현실을 아버지 없는 시대 내지 방향감각이 상실된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기회를 낳는 법입니다. 과거의 규범, 전통적 가치 등이 깡그리 파괴된 상황에서 개인의 비판적 자아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찾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대중화의 위험이 도사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입지점을 마련하여 이에 의존함으로써 어떤 이데올로기 내지 대중적 광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어느 막강한 지도자를 숭배하는 기억을 떠올리면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맹신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과거의 죄를 떠올리고 반성하는 대신에 과거의 사건을 아예 없었던 일로 뇌리에서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치 유년기에 유아 전염병에 시달리듯이 독일인들은 자폐증 환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Mitscherlin 1963: 73).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미첼리히에 의하면 독일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직된 자기 폐쇄적 감정인데, 정치 조직 그리고 사회 조직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가령 독일인들은 오더 나이세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더 나이세 국경은 현재의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흐르는 강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피로 물든 침략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동쪽의 영토를 침탈하려고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북쪽에는 바다가 있고, 독일의 남쪽에는 교황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서쪽에는 천적인 프랑스인들이 버티고 있으니, 진군해야 할 곳은 동쪽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헬무트 콜 수상은 통일 당시에 더 이상 “오더 나이세Oder-Neiße” 국경을 넘지 않겠노라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오더 나이세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일본인들이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 몽니와 비슷합니다. 다른 한편 독일인들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히틀러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도모할 수 있는 정서적 반공주의와 결착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14. 우울과 방어기제: 자고로 인간의 의식 구조는 지극히 보수적인 습성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무엇에 대해 낯설게 여기고, 친숙한 환경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의식의 체제 안주적인 특성은 나아가 정치적 보수주의의 습성에 익숙하게 작용합니다. 지금까지 심리적 태도를 규정하던 어떤 질서가 무너지게 되면, 이에 대해 기대감을 품던 사람들은 어떤 묘한 느낌이 엄습하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우울의 정서입니다. 우울은 애틋하게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정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울한 정서는 순간적으로 변화된 내적 영혼의 상태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이상이 무너지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엄청난 양의 멜랑콜리의 감정을 견지하게 됩니다.

 

이와 병행하여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심리적으로 완강한 방어 기제와 같습니다. 제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전쟁범죄자들이라고 항변하더라도 다수의 일본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유골의 가치를 인정하듯이, 인간은 자신이 과거에 옳다고 확신한 바를 절대로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미처리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차례대로 기술합니다. 즉 충동의 자극 (리비도 그리고 공격 성향), 두려움, 유년기의 이야기, 한 인간의 성격 형성에 기여하는 유년기의 실제 교육 등이 그것들입니다. 나아가 미처리히는 사회적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 사회의 기술화, 대중 사회 도덕과 이상의 상대적 특성을 거론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신 분석학적 이론의 토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5. 사회적 인간, 체제 순응주의: 미처리히의 책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단락은 아무래도 ?도덕의 상대화 - 우리의 사회가 용인해야 하는 모순들에 관하여?입니다. 도덕적 질서 없이는 그룹 내의 공동적 삶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어떤 사회 형태의 일원입니다. 그렇기에 개개인은 제각기 배워나가야 하는 수많은 질서들을 모조리 거부할 수 없습니다. (Tischler: 125). 영혼을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체제로서의 자아를 생각해 보세요. 자아는 교육의 과정 속에서 충동의 포기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개인은 교육자와 동일하게 사고함으로써 내면에 초자아와 이상적 자아 등이 형성됩니다. 이로써 개개인들은 계명 그리고 금지 사항을 추종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로써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체제 순응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은 “남에게 피해주지 말라.”를 가장 빨리 가르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남만 배려하면서 살게 되면, 자신의 내적 열망은 언제나 약화되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체제순응적인 생활방식은 한 인간을 심리적으로 망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준수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체제순응주의는 자신의 심리를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의 방향성을 상실하도록 작용합니다.

 

16. 체제순응주의와 하수인 알리바이: 그렇기에 “과도한 체제 순응주의”는 잘못된 애국심과 결착되어 국가 권력에 대한 열광적 충성심으로 표출됩니다. 이를테면 1945년부터 4년간 지속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끔찍한 죄를 저지른 일급 전범들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으며, 상부의 명령을 충직한 자세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수인 알리바이가 권력자의 충성심으로 합리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상부의 권력에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행동하는 것을 그저 미덕으로 여길까요? 어째서 대부분의 관습과 도덕은 명령 복종 대신에 저항을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요?

 

백장미 운동 당시에 숄 남매가 뿌렸던 체제 비판적 태도로 전쟁 반대를 선언했던 팸플릿은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모조리 경찰서와 파출소에 모조리 수거되었습니다. 이러한 “체제파괴적인 범행 (?)”에 대한 독일인들의 특유한 고발정신은 과연 어디에 기인하는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간단할지 모릅니다. 주어진 관습과 도덕이 무엇보다도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인간의 심리는 새로움과 바깥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의식은 주인에게 꼬리치고, 낯선 사람에게 컹컹 짖어대는 보수적 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마치 욕조의 물은 항상 원을 그리며 안으로 흘러 들어가듯이, 인간의 판단력은 항상 구심력에 이끌려, 체제 옹호적 내향성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