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박설호: 강덕경, 혹은 알렉산더 미처리히 (4)

필자 (匹子) 2022. 5. 10. 19:02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상대적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이란 하나의 윤리 체계 내지 질서를 가리키는 말로서, 주어진 사회의 관습 그리고 법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를 고려하여 우리는 상대적 도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상대적 도덕은 어느 특정한 그룹이 살아남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지배 구조를 보존하게 합니다. 문제는 윤리적으로 인정받는 제반 강령들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상대적 도덕은 특권층에게는 더욱더 많은 쾌락의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일반 계층에게는 불쾌함 그리고 두려움을 심화시킵니다. 주어진 도덕은 언제나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수정되곤 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강자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대중들이 공격 성향을 지닌 채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권력층은 이러한 공격 성향의 방향을 적대자,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환시킵니다. 모든 문제는 자신 때문에 출현하는 게 아니라, 타인 그리고 타국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보나파르트주의로 명명되는 것입니다. 권력층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전해줍니다.

 

그리하여 위정자 내지 상류층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불만의 근원이 위정자 내지 상류층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타국에 대한 나폴레옹 식의 책임 전가주의 내지 무조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방식 등은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자고로 개인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두려움을 스스로 억누르게 되면, 주어진 현실을 검증할 수 있는 비판적 기능은 사라집니다. 이로써 그는 더 이상 주어진 질서와 가치에 바탕을 둔 도덕을 분명하게 비판할 수 없게 됩니다.

 

18.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관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의 방식은 타인에 대한 배려에 근거하고 있다. 60년대 서독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전통적 사회 형태의 변화를 체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는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연과학이 인간 삶 그리고 주위 환경을 엄청날 정도로 거대하게 변화시킨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이 모든 변화들은 개개인들에게 자기 동일성을 빼앗아가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그룹 내에서의 도덕은 더 이상 사회, 국가 전체의 도덕과 반드시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0년 동안에 급작스럽게 변모한 사회 경제적 토대는 인간의 의식 그리고 가치관마저 순간적으로 변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회는 미처리히에 의하면 새로운 심리적 자세 내지 가치관을 요구합니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개개인의 비판적 자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현재 상태에서 반드시 바람직한 행위를 위한 어떤 도덕적 수단, 다시 말해 반드시 인간다운 공동생활을 낳게 하는 어떤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는 오로지 상대방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끝없는 노력 속에서 가능할 뿐이다.” (Mitscherlich 1967: 162).

 

19. 배려, 주인 의식을 포기하는 일, 결속이냐 관용이냐?: 무인도에서 사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타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설령 내가 이곳의 바닥나기라고 하더라도, 나이, 인종, 성별 그리고 국적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피와 토양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처리히에 의하면 타인의 견해를 끌어안고 다른 견해를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아집과 편견 내지 “나 자신이 최고다.”라는 주인의식을 저버리고 타자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과 직결됩니다. 모든 규범을 상대화시키는 태도, 타자 그리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일 등은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도덕을 위한 통합적 구성 성분이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자연과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웃과 이웃 사이의 결속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인종, 성별, 나이 그리고 국적 등을 구분하며 끼리끼리 뭉치는 태도는 구태의연한 것으로서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미덕으로 자리할 수 없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서로 이간질시키게 하고, 파벌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를 부추깁니다. 가장 바람직한 성숙된 사회는 미처리히에 의하면 “다원주의의 사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백만 수천만이 단 하나의 견해를 표방하고 전체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회는 결코 성숙된 현대 사회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회는 결속 대신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강조합니다. 비록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더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발전된 다원주의 사회일 것입니다.

 

20. 미처리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가?: 이미 언급했듯이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지적하려고 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책은 나치 과거를 망각하려는 서독인의 심리적 태도를 예리하게 구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책은 과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해답을 찾지 못하는 독일인 전체의 병적 성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학살의 근원을 파헤쳐서 비극적 사건의 근본적 원인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타 인종에 대한 증오심의 근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밝혀내어 자신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일차적으로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고로 가해자가 일차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범죄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분명히 직시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가해자가 자신의 범행과 범행의 근본적 이유를 분명히 깨닫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 앞에서 사죄하는 일은 시기상조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미처리히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마지막 결론과 같습니다. 적어도 개개인에게 자기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자기비판이라는 망치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범행에 대한 근본적 깨달음은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21.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대한 비판 (1):: 마지막으로 미처리히의 책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응을 다루어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에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책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부분적 하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첫째로 독자들은 미처리히의 책이 낯선 심리학 용어로 서술되어 있어서 쉽게 근접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기실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은 쉽게 읽히는 대중 서적이 아닙니다. 책의 핵심적 논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인내심을 지닌 채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둘째로 미처리히는 전후 독일인들의 반성할 줄 모르는 정서를 심리학적 차원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개별적 성향을 전체적 성향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사회적 문제점 내지 구체적 역사의 문제점이 하나의 타당성 있는 구체적 논거가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미처리히의 책은 두 번째 이유로 인하여 파시즘에 대한 사회 심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 심리』보다 부족한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라이히는 유대인에 대한 질투심의 근원을 충족되지 못한 성에서 찾으면서, 이를 인종학적으로 그리고 스와스티카 (卍)라는 변태성욕을 고취시키는 관점에서 치밀하게 추적해나가고 있습니다. (라이히: 131). 이에 비하면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은 역사적 사회 심리적 고증 작업을 소홀히 하고, 그 대신에 가해자의 심리적 기제에 관해 추상적으로 해명할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처리히의 책은 실업, 전쟁, 이데올로기 등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이에 관한 심리적 동기를 해명하는 일을 정작 소홀히 하고, 그 대신에 서독인 전체의 보편적 심리 구조만을 추상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2.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대한 비판 (2): 미처리히는 이전에 살았던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도덕적 판단 오류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 극복에 관한 프랑크푸르트학파 사람들의 입장과 유사합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가운데 한 사람인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이전 세대가 별 생각 없이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에 추종함으로써 끔찍한 파국이 도래했다고 지적하면서, 전후 세대의 독일인들은 부모의 잘못에 대해서 무언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Adorno: 93). 마찬가지로 미첼리히는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심리적 성향에 집중한 나머지 파시즘의 정치, 경제 그리고 역사적 배경 등에 관한 구체적 분석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가령 68 학생 운동 세대는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면서, 정작 자신은 나치가 저지른 참상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였습니다.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서독의 학생 운동 세대의 태도는 오늘날 일본 정치가들의 그것을 방불케 할 정도입니다. 무관심 세대의 젊은이들은 “전쟁 당시 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모든 책임을 부모 세대로 돌리곤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들은 자신의 심리적 근본 문제를 회피하거나 좌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Mitscherlich 1983: 64). 현재의 일본인 정치가 역시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발뺌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기적으로 전범의 위패가 자리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어쨌든 이로 인하여 “독일인들은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슬픔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지도자의 상실을 더 슬퍼한다.”는 미처리히의 주장은 전후 독일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