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박설호: 강덕경, 혹은 알렉산더 미처리히 (2)

필자 (匹子) 2022. 5. 8. 11:51

(앞에서 계속됩니다.)

 

6. 경고를 위한 사회 분석의 책: 원래 책의 제목은 “슬퍼할 줄 모르는 무능력Die Unfähigkeit zu trauern”입니다. 이 제목은 일견 독자에게 감정에 호소한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미처리히의 책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잊을 수 없는 무엇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슬퍼한다는 것은 우울한 감정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치의 만행으로 핍박당한 사람들의 비극을 애통해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함께 괴로워한다.”는 점에서 “동정Mit-Leid”과 같은 정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문맥을 고려하여 책의 제목을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이라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함께 괴로워하는 정서를 고수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나치의 만행으로 희생된 그들의 고통스러운 행적을 더 이상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정 인간에 대한 무지 내지 외면은 언제나 어떤 전체주의의 편견을 재탄생시키고, 인종에 대한 불신과 선입견을 조장하게 합니다. 미처리히 부부는 지금까지 정신분석학을 오로지 개개인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60년대 서독에 거주하는 독일인의 정서적 상태에서 어떤 병리적 현상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개개인에 관한 병리학적 이론은 나아가 사회적 병리학의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그들은 확신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은 프로이트의 후기 작품 "대중 심리학과 자아 분석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1921)에서 기술된 논증에 근거하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7. (부설) 프로이트의 『대중 심리학과 자아분석』(1): 여기서 우리는 잠시 프로이트의 작품을 개관한 다음에 논의를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로이트는 1921년에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 (Gustave Le Bon, 1841 – 1931)의 연구서, 『대중의 심리학Psychologie des foules.』에 실린 논점을 적극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중은 르봉에 의하면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군입니다. 인종, 나이, 성별 등에 있어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사회 내의 대중의 입장이라든가 세계관을 명확히 확정할 수 없습니다. 대중의 다양성은 변화불측한 입장의 변화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대중의 견해는 마치 하늘 위의 연기처럼 일시적으로는 세상을 암울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뜬소문과 거의 동일합니다. 르봉은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배심원으로 선정된 사람의 우유부단함 내지 잘못된 결정을 예로 듭니다. 배심원으로 선정된 사람은 다른 배심원의 영향에 흔들려 스스로의 입장을 번복하기 일쑤입니다. (Le Bon: 168).

 

르봉의 이러한 논의의 배후에는 지적으로 저열하고 견해 없는 인간군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 속에 무한한 권력을 쟁취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자가 은밀히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충동을 극대화시켜서, 개개인이 사회에서 행할 수 있는 한계를 순간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대중에게 전염시키는데, 이에 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무런 대중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감정을 추종합니다. 아니 그의 입장에 막연히 동조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여기서 대중이 추종하는 감정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충동적이고, 자극적이며, 변모 가능한 것입니다.

 

8. (부설) 프로이트의 『대중 심리학과 자아분석』(2): 프로이트는 대중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그 하나는 뭉쳤다고 금방 해체되는 그룹으로서 일시적인 충동의 경향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대중은 어떤 특정한 관심사 내지 어떤 유사한 견해를 동질적으로 지닌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중은 문학적 표현을 빌면 “견해의 아지랑이”와 같은 존재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내지 군대의 그룹으로서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충동의 경향을 내세웁니다. 일반 대중들이 다양하고 변화불측한 견해를 드러낸다면, 교회 내지 군대 집단이 표방하는 견해는 확고하고, 냉정하며, 집요하고, 오래 지속되는 입장을 표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내지 군대의 일반적 입장이 대중의 견해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으로 대중과 괴리된 상태에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대중 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즉 개개인의 충동 내지 성충동은 대중에 의해서 곡해된 채 방향이 전환된 모습으로 출현합니다. 이때 개개인의 나르시스적인 리비도는 객체로 전이된다고 합니다. 개개인의 충동은 대중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출현하지는 않고, 오히려 왜곡된 형태로 전환 내지 환치되어 표출됩니다. (Freud: 74). 여기에는 다른 세력 이를테면 군대와 교회의 집단적 영향력이 교묘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대중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환치된 욕구의 계기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전체적 욕망은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개별 욕망과 어떤 부분에서 이질적인데, 우리는 어떤 계기에 의해서 개개인의 욕망이 어떤 다른 유형의 욕구로 환치되어 출현하는가? 하고 비판적 자세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사항은 권력자를 추종하는 대중의 경향입니다. 마치 욕조의 물이 한 가운데의 구멍으로 모이듯이, 대중의 욕구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내향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중은 자신이 추구하는 완전성을 어느 특정한 지도자에게 전가시켜서, 스스로 그와 동일시되려고 합니다. 지도자 숭배현상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출현하게 됩니다.

 

9.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는 가해자의 태도: 원래 인간은 특히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를 쓰곤 합니다. 이는 트라우마, 즉 심리적 외상을 당하지 않으려는 반작용입니다. 이를테면 과거 전쟁 당시에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일본의 보수주의 정치가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직접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지 않은 제 2세대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수많은 정신대 사건들, 관동 대지진의 생매장 사건들은 현실과는 무관한,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곤 합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태도는 때로는 과거의 잘못을 분명히 직시하지 않으려는 성향에서 비롯합니다. 이러한 성향이 개인적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의 성향이 되면, 그것은 미처리히에 의하면 “집단적 망각”이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가해자의 이러한 무능력은 타민족을 침공한 다음에 모든 것을 착취한 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보편적인 병리 증상으로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야하는 영혼이 무언가에 의해 방해 당하고 있는 증후군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는 가해자의 망각 증세인데, 과거에 저지른 죄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은폐하려는 기형적인 신드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현상을 정신분석학의 수단으로 규명한다면, 우리는 사회 변화의 과정 속에 도사린 심리적 진행 과정의 기능을 예리하게 해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수치스러운 기억을 지우려는 두 가지 이유: 미처리히는 가해자의 심리상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죄가 탄생한 곳에서 가해자는 무언가 후회하게 되고, 심리적으로 모든 것을 올바른 이전 상황으로 되돌리려고 느낀다고 합니다. 손실로 인해 고통 받는 곳에서는 으레 일시적으로 슬픔이 돌출하는 법입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자존심이, 그리고 인간의 오랜 열망으로서의 이상이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 가해자의 마음속에 수치심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 수치심으로 상처 입은 가해자는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차단시킵니다. (Dubiel: 483).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과거의 정치적 역사에 대해 이런 식으로 죄의식을 느끼거나 슬픔의 감정을 인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무작정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쓰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미처리히는 -권력자든 일반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죄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심리적 거부감에서 발견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또 한 가지 다른 이유로서 소시민의 책임 회피를 거론합니다. 내 주위에서 발생한 과거의 끔찍한 죄는 나 자신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록 투표장에서 히틀러를 지지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유대인들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항은 전후 세대의 독일인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