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마르크스의 자유의 나라에 관한 유토피아 (5)

필자 (匹子) 2018. 1. 12. 10:42

(앞에서 계속됩니다.)

 

23. 마르크스주의의 난류: 블로흐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먼 목표, 다시 말해 미래의 이상을 예술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선취하는 작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업입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작업을 마르크스주의의 난류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작업을 처음부터 경원시하였기 때문에 ,혁명의 과정에서 자신의 전략을 수정하고 타협적으로 처신했다고 블로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측정, 페스트의 시대, 3월 전기Politische Messung, Pestzeit, Vormärz에서 스탈린의 정책을 찬양하고 핵에너지에 대한 블로흐의 기대감 시대착오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장 정책에서 나타나는 블로흐의 오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음의 명제를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목표를 잡치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 마르크스주의는 당면한 문제에 집착하고, 먼 목표를 등한시하곤 하는 정치경제학자의 전문분야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의 난류는 최소한 문학과 신학 그리고 신학에서 병행하여 연구되고 발전되어나가야 한다고 블로흐는 믿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난류를 고려할 때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이론만을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학이 마르크스주의의 한류하면, 우리가 추적해 나가야 하는 일은 미래의 평등한 삶을 철학적으로 미학적으로 선취해나가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24.자본에 암시되어 있는 자유의 나라: “자유의 나라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명확하게 그리고 방법론적으로 유연하게 설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난류를 확정시키는 작업입니다. 블로흐는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즉 마르크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의 나라에 관하여 세밀하게 설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본의 수백페이지에 걸쳐 자본가가 어떠한 교활한 방법으로 잉여가치를 자신의 이득으로 빼돌리는가? 하는 과정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에 반해서 미래에 도래하게 될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는 기껏해야 몇 마디의 암시만을 던졌습니다. 이는 오언, 푸리에 그리고 카베, 생시몽이 시도한 추상적 유토피아 설계의 방법론들과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실제 현실의 모순점들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미지의 공동체를 세밀하게 전면 배치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들은 권력자에 핍박당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의 사항들을 가급적이면 줄이고, 그 대신에 바람직한 현실적 사항을 가상적으로 휘황찬란하게 묘사했던 것입니다.

 

25. 가능성의 영역에 도사린 자유의 나라: 따라서 블로흐는 마르크스가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 함구했다는 가설을 부정합니다. 그 대신에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마르크스의 몇몇 작은 암시 속에서 자유의 나라에 관한 어떤 중요한 몇 가지 사항들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다음의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자유의 나라는 궁핍함과 외부적 합목적성에 의해서 정해진 노동 행위가 중단되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그 영역은 고유한 물질적 생산 영역의 저편이다. 원시인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필요한 무엇을 재생산하는 등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싸워야 하듯이, 문명사회에 사는 사람 역시 모든 사회 형태와 모든 가능한 생산 양식 속에서 그러한 노력을 쟁취해 나가야 한다.” (MEW Bd. 19: 828)

 

26. “인간의 미래는 하나의 틀로 확정될 수 없다.”: 앞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의 나라에서는 인간의 고유의 권리가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행하며, 더 이상 권력자들에게 고개 숙이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돈 없고 힘없는 인간은 당당하고 의연하게 일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사유 재산과 강제 노동이 철폐된 현실적 여건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이윤 대신에 필요성에 의해서 상품을 생산해냅니다. 이 경우 불필요한 상품이 생산되어 재고품으로 남는 경우는 드뭅니다. 따라서 그것은 가치로서의 부 내지 풍요로움을 가리키는데, 사용가치의 풍요로움Reichlichkeit”을 지칭합니다. (윤소영: 69).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가 자유의 나라의 실현 방안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미래는 결코 하나의 틀로 확정될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확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는 현재 한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 하나의 틀로 확정될 수 없습니다. 만약 자유의 나라가 하나의 틀로 확정된다면, 역사철학의 역동성과 개방성은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져 있는 것일 테니까요. 마르크스는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 함구함으로써 어떤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과업을 후세 사람들에게 내맡긴 셈입니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 역시 추상적 유토피아 사상가의 대열에 합류했을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로마서824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보세요.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