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1):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토피아를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 의미를 담은 유토피아의 사상적 특징들이 용해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사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통적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시도한 찬란한 이상적 삶을 노골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하는 의향 속에는 근본적으로 더 나은 삶에 관한 꿈,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의 의향 내지 구체적 희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한스 프라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토피아를 부정적 개념으로 파악하였지만, 그들은 공산주의의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어떤 유형의 천국을 꿈꾸었다.” (Freyer: 151)
18.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2):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의향 속에는 수십 가지의 희망 사항이 내재해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토피아의 개념을 축소화시켜서 과거에 일회적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의 사고로 이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한편 근본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유토피아의 사고를 건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부정의 부정Negation der Negation”이라는 마르크스의 논리의 배후를 면밀하게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억압과 강제 노동이 없는 찬란한 삶이 추상적 유토피아의 상이라면, 자본주의의 이윤추구가 사라지고 무산계급이 그들 고유의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삶은 구체적 유토피아의 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에른스트 블로흐는 사회주의를 “구체적 유토피아의 실천”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블로흐: 43).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의 문학 작품에 담겨 있는 더 나은 세계에 관한 인간의 꿈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체제 내에서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개념은 결코 역사에서 일탈되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19.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사린 유토피아의 세 가지 요소 (1): 만약 유토피아를 역사 속에서 유효한 개념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사린 긍정적 갈망의 상을 일단 유토피아의 요소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도사린 유토피아의 특성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데, 이는 세 가지 사항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의 새로운 가치에 관해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은 소외 현상을 극복한 창의적 노동을 가리킵니다. 이는 전인적 삶에서 비롯하는 노동으로서 이윤추구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감과 관련됩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Deutsche Ideologie』에서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거나 책을 읽는 인간의 전인적인 생활을 언급하였습니다. (MEW, Bd. 3,: 33). 이는 노동의 분화에서 기인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며, 그 자체 전인적 삶의 모범으로 활용될 수 있는 생활방식입니다.
20.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사린 유토피아의 세 가지 요소 (2):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사린 유토피아의 두 번째 요소는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1875)에서 발견됩니다. 바람직한 사회의 질서를 세우고 새로운 법적 모델을 정착시키려면, 무엇보다도 “분배의 정의로움iustitia distributiva”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높은 단계에 이르면 (...) 편협한 시민적 법의 지평이 완전히 절개되어나가고, 사회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기치로 내걸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모두에게 그들이 필요한 재화를 돌려주는 것 말이다.” (MEW, Bd. 19: 21). 사실 재화의 분배를 정의로운 방식으로 추진하는 일이야 말로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가장 인간적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에서 흥분한 무산계급의 서슬 푸른 칼을 연상하곤 합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19세기 독일 사회에서 무산계급으로 하여금 그러한 폭력을 부추기는 대상이 바로 독일의 사악한 자본가 부류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면 분배의 정의로움은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들의 고유한 권한을 되돌려주는 일과 같습니다.
21.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사린 유토피아의 세 가지 요소 (3): 세 번째 요소는 엥겔스가 피력한 바 있는 국가 사멸에 관한 이론과 관련됩니다. “사회적 생산이 무정부적으로 추진되면, 국가의 정치적 주권도 이와 상응하게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사회화의 과정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게 되며, 자연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Engels: 228). 인용문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속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간을 가리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은 엥겔스가 하나의 과정의 측면에서 이를 서술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사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궁극적인 목표로 이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사멸이란 엥겔스에 의하면 국가의 거대한 기능이 소멸된다는 뜻이지, 국가 자체를 불필요한 존재로 이해하고, 이를 처음부터 무조건 없애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소멸을 하나의 목표로 삼는 것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를 통한 평등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 것은 분명히 차원이 다릅니다. 자유의 나라에서의 국가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치안 유지 내지 공적으로 필요한 행정을 담당하는 최소한의 기관으로 축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능이 약화되거나 축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전체주의 국가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개개인의 자유를 옥죄이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22. 자유의 나라와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특성: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에른스트 블로흐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사린 유토피아의 요소 내지 이와 관련되는 구체적인 대안을 분명하게 추구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체적인 대안이란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노동을 행할 수 있는 평등 사회를 이룩하는 방법과 관련됩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평등사회를 “자유의 나라”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면모를 지니며, 어떤 식으로 영위되는 사회 시스템일까요? 많은 마르크스 사상가들은 이에 관해서 그다지 열정적으로 골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먼 목표가 아니라, “가까운 목표Nahziel”,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에 당면하게 요구되는 구체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전략에 집착하였으므로, 무의식적으로 “먼 목표Fernziel”에 등한시하였습니다. 오로지 블로흐만이 유일하게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블로흐에 의하면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거와 현재 현실에 관한 냉엄한 분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어진 현재의 현실에서 계급적 모순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이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이 다음 단계의 전략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작업을 “마르크스주의의 한류”로 규정하고 혁명을 이행하는 데 아주 중요한 과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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