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22. 라캉 이론의 문제점 (1): 지금까지 우리는 라캉의 이론을 초보적 수준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문학 이론상으로 고찰할 때 라캉의 이론은 후기 구조주의 및 해체 이론 등의 시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라캉은 무의식을 말하기 행위로써 도출해내어, 이를 동일한 차원에서 고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라캉의 이러한 태도는 몇 가지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무의식의 공간은 언어 영역 내의 의사 전달에 불필요한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 이전의 여백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인간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혹은 심리적 이유로 인하여 말로써 모든 것을 발설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고로 성에 관한 사항을 타인에게 발설하는 것은 참으로 껄끄러운 법입니다. 그것은 언어의 기표만으로써 해명될 수 없을 정도로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성을 발설하지 못하는 수치심은 어쩌면 오랫동안의 사회적 터부로 작용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심리적 차단 외에도 사회적 억압 구도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독재와 억압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무언의 침묵이 오히려 진리의 내용에 가깝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Traktatus』에서 따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무엇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Wittgenstein: 7).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이 무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 여백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무엇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어 철학적인 논의를 개진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 셈입니다. 다른 한편. 라캉은 언어의 전달 기능이 차단된 곳에서 인간 심리의 이상 증세가 발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사람은 비언어의 영역을 논의에서 차단시켰고, 다른 사람은 언어로 의식될 수 없는 영역이 언어적 기표 등으로 부분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가 (제스처, 표정 등이 포함된) 육체 언어 내지 비-언어의 영역을 일차적으로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의 문제는 언어의 기호학적인 측면이 너무나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결코 언어를 통해서 완전히, 혹은 충분하게 발설되거나 해명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3. 라캉 이론의 문제점 (2): 이미 언급했듯이 라캉은 “무의식은 마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무의식은 언어의 저편에 자리한,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무의식 속에는 인간의 언어로 표출될 수 없는 상당히 많은 부분의 전의식 내지 무의식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 체계는 오로지 인간의 언어만으로써 드러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언어는 그야말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의 빙산 일각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물론 라캉 역시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의 기능 속에서 존재적인 것은 “갈라진 틈”이라고 합니다. (이종영: 86). 라캉이 대화의 단절, 머뭇거림에 주의력을 집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라캉은 대화 속에서 말이 차단되는 순간 내지 소통의 차단에서 무의식 내지 질병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표현했는데, 이러한 주장 자체가 바로 무의식의 언어 표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처사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상과 감정은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검열의 사회적 심리적 터부 속에서 비언어적 행동 양상 (제스처, 표정 등의 육체 언어)으로 은밀하게 표출될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상징계는 너무 고착되어 있어서, 어떠한 수많은 인간 유형의 사랑의 패턴을 전적으로 포괄할 수 없습니다. 가령 성 소수자의 사랑의 삶은 라캉의 경우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의 명징한 구조주의의 틀 속에서 해명되므로, 예외적 사항은 추상적 논리의 카테고리 속에서 거의 질식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물론 라캉이 말년에 특히 여성성과 관련되는 “타자의 주이상스”의 개념을 통해서 무의식의 저편의 여운을 암시했지만, 이 역시 이전의 이론적 틀을 저버려야 진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자고로 이론 속에 부분적인 결함이 연이어 속출하면, 그 이론을 끊임없이 내재적으로 수정할 게 아니라, 그 이론 자체를 파기해버려야 마땅합니다.
24. 라캉의 문제점 (3): 라캉과 라캉주의자들은 팔루스의 개념을 남근에 해당하는 페니스와 구분시킴으로써 프로이트의 거세 콤플렉스 내지 남근 선망의 시각 속에 도사린 하자 내지 불완전성을 비켜가려고 의도했습니다. 이로써 팔루스 개념은 해부학적 실제에 대한 모든 구체적인 토대를 벗어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라캉주의자들이 남성의 신체 기관에서 팔루스의 상징성을 도출해내어서, 이를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의식적 내지 무의식적 의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Wilden: 271). 이와 관련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팔루스가 특권적 기능을 차지할 권한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페니스가 인간성의 생물학적 기원이라는 사실이 불충분하다면, 팔루스는 페니스의 기표가 아니라, 무한적 떠도는 기표에 불과하다는 게 버틀러의 지론입니다. (Butler: 88). 아니나 다를까 라캉은 팔루스를 주어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념의 영역에 속하는 변증법적 현실 속의 개념으로 환치시킴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임옥희: 76). 여기서 드러나는 남근 선망에 대한 은폐 이론은 나중에 “타자의 주이상스”라는 개념과 접목되어 남성중심주의의 지배적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25. 라캉의 문제점 (4): 결론적으로 말해서 라캉은 처음부터 프로이트의 이론에 구조주의의 그물을 드리워서, 생물학의 내용을 심리학의 그것으로 대치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특정 사람들의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토대를 외면하면서, 그들의 심리 구조를 어떤 비가시적 패러다임 속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이로 인하여 찾아낸 것은 주어진 현실과 생명 존재로서의 인간의 제반 심리 사이의 관련성이 아니라, 예컨대 기표로서의 팔루스, 상징계의 질서 등과 같은 예지적이며 추상적인 담론의 전문용어들이었습니다. 라캉이 말하는 팔루스는 특정 사회 내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토대를 밝히는 데 적절하지 못하며, 인종, 사회 그리고 특정 계급 등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의 추상적 얼개에 불과합니다. (프레이저: 205).
따라서 라캉의 팔루스의 개념과 상징 질서를 둘러싼 담론은 심리적 증상과 질병의 완화 내지 치료에 최소한의 도움도 주지 못하며, 이른바 기표로서의 팔루스 내지 상징 질서를 대신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사상적 단초를 찾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자유주의자 프로이트는 개별 환자의 병적 증상을 치료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등 실질적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자고로 페미니즘 운동은 언제 어디서든 간에 젠더를 둘러싼 난제 뿐 아니라, 특정 사회 내의 사회 구성원의 역할과 영향력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실천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데, 라캉은 이러한 실천 가능성을 도외시한 채 모든 담론의 내용을 몇몇 용어 내지 추상적 구도 속에 구속시키고 있습니다.
26. 라캉을 넘어서: 라캉은 심리학 연구 분야 뿐 아니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를테면 알튀세르는 라캉의 타자에 입각한 심리학을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관련시켰습니다. 마치 라캉이 프로이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했듯이, 알튀세르는 다시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라캉의 거대한 타자에 관한 논의는 마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정부 질문과 같이 활용된 바 있습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알튀세르의 철학적 논쟁을 접하면서, 라캉의 이론을 근거로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전면적 도전을 구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책, 『성의 역사』는 정신병자, 동성연애자 내지 변태 성욕자등에 대한 국가의 집요한 폭력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 )의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수용입니다. 그는 라캉의 이론을 한편으로는 유럽 철학사에 대입하여, 주체의 빈틈을 예리하게 천착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분석학적 결론을 현대의 대중문화에 적용시켰습니다. 매트릭스, 히치콕 그리고 사이언스 픽션 속에는 인간의 욕망 충족의 흔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Žižek: 97f).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학을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 그리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확장시키고 심화시켰습니다. 이때 그미는 라캉의 이론을 도입하면서도 라캉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비판했습니다. 특히 라캉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언어는 화용론의 측면에서 주어진 역사와는 너무 동떨어진 채 추상적인 의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
참고문헌
- 라이트, 엘리자베트 (1997):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 고갑희 외 역, 한신문화사.
- 이종영 (2012): 내면으로. 라깡, 융, 에릭슨을 거쳐서, 울력.
- 임옥희 (2008):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이연.
- 프레이저, 낸시 (2017): 상징계주의에 대한 반론, 실린 곳: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역, 돌베개, 195 – 221쪽.
- 호머, 숀 (2005): 라캉 읽기. 정신분석과 미학 총서 2, 김서영 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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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den, Anthony (1968): Lacan and the Discourse of the Other. The Language of the Self, The Function of Language in Psychoanalysis by Jacques Lacan, Baltimore.
- Vapereau, Gutave (1876): Dictionaire universel des Littératures, Paris.
- Wittgenstein, Ludwig (1963):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Frankfurt a. M.
- Žižek, Slavij (1991): Liebe Dein Symtom wie Dich selbst!. Jaques Lacans Psychoanalyse und die Medien, Berlin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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