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서로박: 자크 라캉의 이론 (4)

필자 (匹子) 2018. 7. 12. 17:13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치료는 상상 속에 엉켜 있는 심리적 상흔을 재현시키는 작업이다. (2): 달리 말하자면 의사는 행동이 아니라,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환자가 마지막 말을 스스로 끄집어낼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의사는 주체의 논의에 대해 아하”, “그런가요?” 등과 같은 발언을 첨부하면 족하다고 합니다. 환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왜곡되어 있는 상징적 질서는 진리로 비유될 수 있는데,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는 당사자는 의사가 아니라, “완전히 말하는환자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라캉의 정신 분석학은 한마디로 우주의 비밀을 찾아내려는 해석학이 아니라, 질병의 증상을 찾아내는 탐색 작업으로 끝납니다. 따라서 해석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효과는 없으며, 오히려 증상속의 의미심장함의 (모든 의미 내용 없는) 표현만을 추적할 뿐입니다. (Lacan 1996: 83f). 라캉은 말하기는 주체의 잘못 인식된 부분의 자궁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때 라캉은 주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 경우 주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다른 상, 타자에 의해서 행해지는 언어가 발설되는 겻입니다. 그는 말하기가 타자의 장소로부터 전해지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핵심적 수행 과정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그것을 추종하고 있다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 대화 내지 발언 속에 엉켜 있는 고리, 보로매우스의 매듭: 말하기의 두 가지 양태는 때때로 서로 간섭하고, 의미 고리를 차단시킵니다. 이를테면 환자와 의사 사이의 대화가 중단되는 경우는 바로 그러한 교차점에 해당합니다. 라캉은 무의미한 내용 속에서 주체의 진리를 풀어헤치는 작업을 정신 분석학의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대화 내지는 발언 속에 매듭지어진 고리 속에는 어떤 숨겨진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진리의 추적은 라캉의 경우 궁극적으로 말하기로 귀결됩니다. 말하는 행위의 고유한 특성은 토론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토론의 차단 내지는 방해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말하기 행위 내에서 토론의 한계를 벗어나는 무엇을 도출해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적 언어를 표현하는 주체는 언제나 토론의 주체로부터 일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상징 계, 상상 계 그리고 실재라는 세 가지 구조의 매듭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라캉은 이 공간을 보로매우스의 매듭이라고 명명합니다. 보로매우스의 매듭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뒤엉킨 채 묶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Evans: 65). 그것들은 제각기 하나씩 짝을 이룬 채 매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완전하게 안정하지 못하게 하고 정착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의 심리 구조가 마치 구름처럼 부유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보로매우스의 매듭이 서로 불안정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18. 정신병자의 망상: 정신병자는 자신의 심리구조가 파괴된 인간 유형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붕괴된 보로매우스의 매듭을 어설프게 망상이라든가 환각 등으로 복구시킨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경우 망상과 착각은 서로 분리된 매듭을 어떻게 해서든 봉합에 활용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상상계가 아니라, 상징계가 붕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심리구조는 거짓 매듭의 형태를 드러냅니다. 여기에서 망상은 하나의 유사 상징계 속에서 가상적으로 떠올린 형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신병자의 상징계는 대체로 아버지의 영향권이 배척됨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있는데, 그는 애써 상상계의 내용을 끌어내어, 상징계를 거짓 매듭으로써 인위적으로 채워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망상은 단순히 질병의 표현으로만 간주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망상은 무너진 상징 계를 복원시킨 것으로서,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우려는 환자 나름대로의 어설픈 시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19. 성도착자의 경우: 이와는 달리 성도착자에게는 상징계가 아니라, 현실계가 붕괴되어 있습니다. 성도착자는 어떤 특정한 물건에 대해 심하게 집착하고 거기에서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경우 성적 흥분의 대상은 다른 사람, 혹은 어느 특정한 물건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붕괴된 실재의 고리는 하나의 신처럼 귀중한 물건으로 보완되어 있습니다. 주어진 특정 대상은 그들에게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신적 존재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착자들이 실재 현실에서 성적 차이의 구분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특정한 물건이 팔루스의 특성을 담고 있는가, 아니면 바기나Vagina의 특성을 지니는가? 하는 물음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착자가 실재 세계에서 특정 사물을 신격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차이를 봉합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정신병자와 달리 성도착자에게 상징계는 파괴되지 않고 온존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착자들은 세상의 질서, 권력 구조 등을 분명히 의식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성도착자에게는 정신병을 야기하는 파괴적 심리구도가 자리하지 않습니다.

 

20. 신경증자의 경우: 신경증 환자는 라캉에 의하면 증상을 통해서 상징 게의 고리를 하나 더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성도착자, 정신병자와 달리 신경증자는 상징 계, 상상 계, 현실계의 세 범주 모두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경증자는 내면의 결핍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감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신경증 환자는 일상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 일인지 분명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Schneider-Harpprcht: 293). 그는 실재 (혹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결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네 번째의 고리를 필요로 합니다. 신경증 환자의 경우 두 개의 상징 고리로써 보로매우스의 매듭의 이른바 위태로운 속성이 어느 정도 완화됩니다. 이전과 달라진 점으로 상징계의 고리가 두 개가 됨으로써, 상징계의 위치가 고정되었음을 우리는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원을 가진 매듭에서는 어떤 특정한 원을 상징 계 혹은 상상 계 혹은 실재라고 고정적으로 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제 네 번째 원이 도입됨으로써 상징계의 위치가 고착되었고, 보로매우스의 매듭 내부에 '내적 이질성'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보로매우스의 매듭의 서로 어긋나게 연결된 특징이 약화됩니다. 네 개의 원 중에서 상징계에 속하는 두 고리는 직접 연결되어 있는데, 두 개로 나뉜 상징계의 매듭을 하나의 매듭으로 간주할 때 이 매듭과 다른 매듭 상상계- 도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징계의 특징인 비고정성이 상상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이 상상 계를 매개로 상징 계와 현실계 사이의 연결이 더욱 규정화 되어 있습니다.

 

21. 네 번째 매듭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캉은 네 번째 고리를 증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심리적 실재,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60년대 이후의 시기에 라캉은 순수차이를 의미했던 아버지의 이름이 증상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위상학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순수한 이름으로서의 아버지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지식을 가진 신비적 아버지로 기능할 때 그것은 증상이 됩니다. 상상적인 아버지,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신경증자는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순수차이를 메우고, 실재와 상징 계를 굳게 결합시킵니다. 결정적 하자는 네 개로 이루어져 있는 보로매우스의 매듭의 견고함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자고로 무엇이든 강하면 부러지는 법입니다. 인간의 심리구조는 생동하는 인간 생명의 유동성 내지 탄력을 지녀야 합니다. 리비도는 유약하고, 끈적거리는 것이며, 마치 흐르는 물, 움직이는 에테르와 유사합니다. 만약 그것이 네 개의 고리에 의해서 차단되거나 경직되면, 원래의 유연하고 유동적인 기능을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신 질환자들 가운데에서 특히 신경증 환자가 유독 오르가즘 능력을 상실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