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1. 욕망의 언어, 무의식은 하나의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 명제는 라캉의 경우 매우 중요합니다. 라캉의 분석은 주체를 어떤 욕망의 언어 속으로 도입합니다. “첫 번째 언어langage premier”는 언어적 측면에서는 우주적이긴 하나, 욕망의 표출 내지 인간화 행위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주체의 급진적 특수성으로 이해됩니다. 라캉은 무의식의 영역을 (누군가 말을 꺼내려 할 때의) 언어 효과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어란 말하기와 동일하지 않고, 의사소통으로 축소화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라캉이 생각하는 말하기는 주체와 타자 사이를 중개할 뿐 아니라, (표현 기능이 왜곡됨으로써 의사소통의 매개체로부터 일탈되는) 무의식적인 것을 표출하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라캉에 의하면 오로지 (주체에게 자신의 신분을 부여하는) 말하기의 효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무의식은 하나의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이 경우 주체는 타자에 속할 뿐이라고 합니다.
12. 언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소환의 기능: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의사 소통 내지 정보 전달의 의미로서의 언어의 기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사소통과는 무관한, 정보 전달에 불필요한 언어의 부분이 라캉에게 중요합니다. 자고로 정보의 일원체로 측정될 수 있는 우주적 시스템으로서의 언어는 때로는 언어의 “부분적 파롤parole particulière”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소환의 기능입니다. “정보 전달에 불필요한 언어적 부분Redundanz”이 의사소통의 과정으로부터 일탈되어 나옴으로써 언어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어는 여기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은폐된 무의식의 욕망을 소환해내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은폐된 무의식의 욕망을 소환해낸다면, 정신 치료의 과정에서 “완전히 말하기”라는 라캉의 개념은 본연의 소임을 다하게 됩니다. 그래, “완전히 말하기”란 주체의 진리를 실현시키는 매개체입니다. 환자는 완전히 말하기의 방식을 통해서 상상 속의 왜곡된 상을 부분적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서 왜곡된 상은 상징계의 강한 영향 때문에 얽혀 있는 고리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정보의 전달이라는 언어의 기능에 의해서 밖으로 표출될 수 없는 무의식적 억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단순히 말하는 행위는 -언어가 체계로서, 문화가 “선험적 무엇a priori”, 다시 말해 익명성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에서는- 그야말로 공허할 뿐입니다.
13. 현실의 영역, 상상의 영역: 문제는 우리가 인간의 존재를 두 가지, 다시 말해서 원래의 존재 그리고 상상 속의 존재로 구분해서 인지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성숙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초기 성숙Prämaturation”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령 그것은 (동물과 구분될 수 없는) 상상적인 것을 분열시키게 작용합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제 영역 그리고 상상의 영역 속에서 공생 (共生)하도록 작용합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의식의 분열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라캉에 의하면 자아의 상 내부에서 자신의 소외된 단일성을 발견하지만, 욕망을 통해서 균열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습니다.
현실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은 포착될 수 없고, 발설될 수 없으며, 인위적으로 조절될 수 없는 무엇입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 Id와 유사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은 실제 현실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외부 세계로 향해 사고하지만, 상상의 현실 속에서는 어떤 초라한 자아와는 반대되는 자신의 존재 그리고 주체를 더 이상 억압하지 않은 안온한 세계가 엄연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욕망하지만, 욕망은 충족되지 않으므로, 그 대신 하나의 안온한 가상 세계를 차선책으로 표상합니다. 이러한 안온한 가상 세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갈망하는 자아와는 다른, 어떤 충족된 자아를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자아야 말로 균열된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는 “어떤 생물학적 비적응성”의 결과로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경우 상상의 자아는 언어를 통해 교묘하게 밖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
14. 상징의 영역: 무릇 외부세계에 자신을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는 고통을 동반하는 법입니다. 이는 어린이들의 장난과 유희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가령 주체는 “자신의 고립화”를 모방하며, 어머니가 곁에 없다는 소외감을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려고 합니다. 놀이에 수반되는 소리 속에는 결핍을 명명하는 상징적인 것이 일차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러한 상징성이 상징계 내지 상징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이를테면 인간 존재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징성 속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원래 상징은 피어스Peirce에 의하면 사회 계약이라는 관습에 토대를 둔 무엇으로서 특정 대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 고정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Peirce: 113ff). 그런데 라캉은 이를 뒤집고 상징을 법과 언어의 질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담론 내지 언어의 질서이며, 아버지의 법칙으로서의 거대한 타자와 관련됩니다. 라캉은 상징에 관한 이론을 세 번에 걸쳐 변화시켰는데, 이에 관한 세부 사항들은 너무 복잡하므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라이트: 666f).
어쨌든 상징은 담론의 질서이며, 국가 지배의 질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상징적 질서는 때로는 경제의 질서이며, 부권적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라캉의 상징의 영역, 즉 상징계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계는 초자아의 특성 외에도 힘과 권력을 의식적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상징의 질서는 언어의 질서 내지 힘과 권력의 질서이며, 주체는 이에 언제나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라캉은 “쾌락 원칙을 넘어선 저편의 영역은 어떠한가?”라는 프로이트의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죽음 충동은 라캉에 의하면 직접적인 파괴 의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깡그리 파괴하려는 열망을 가리키는데 (Lacan 2014: 255), 실현되지 않은, 다시 말해 인정받지 못한, 무언 (無言)의 상징적 질서로 향한다고 합니다. 죽음의 세계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언의 상징적 질서와 연결됩니다.
15. 치료는 상상 속에 엉켜 있는 심리적 상흔을 재현시키는 작업이다. (1): 따라서 라캉의 정신 분석학에서는 언어, 다시 말해서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분석학은 (이른바 상상적인 것이 상징화되어 있는) 말들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수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언어야말로 환자의 내면에 도사린 왜곡되어 있는 상징적 질서의 틀을 파괴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적 대화에 담긴 상상적인 것은 거짓된 상을 해체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라캉은 하나의 증상을 주체 속의 어떤 무언의 존재로서 파악하며, 이를 분석의 과제로 삼습니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말하면서 주체를 재집결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라캉은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환자가 상상하고 있는 무엇 속에 도사리고 있는 왜곡된 흔적, 거짓된 흔적을 도출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왜곡된 상 내지 상상 속에 엉켜 있는 심리적 상흔을 말로써 재현시키는 작업 – 이것이야 말로 라캉의 심리학의 방향성의 핵심 사항입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환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내면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발설하도록 유도하는 일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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