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생태주의 유토피아 (4)

필자 (匹子) 2019. 5. 26. 15:27

요스트 헤르만트 (Jost Hermand, 1930 - )1980년대부터 생태주의 유토피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의 핵심적 관심사는 파시즘과 민족주의의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유토피아의 문제를 추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헤르만트의 문헌들은 20세기 말의 주어진 삶의 정황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놀랍게도 문헌 속에서 약 200 편의 텍스트를 거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반 문헌에 대해 수동적 자세를 취하며 그것들을 요약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1950년대에 프랑스의 연구가 레이몽 루예 (Raymond Ruyer)는 유토피아를 두 사지 사항, 즉 문학적 장르와 유토피아의 사고로 나누어 설명했다. 유토피아의 사고는 루예에 의하면 오로지 문학 텍스트 속에만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토피아의 사고는 헤르만트의 경우 미래를 염두에 둔 사고로서 어떤 찬란한 갈망의 상일 뿐 아니라, 어떤 추악한 경고의 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헤르만트는 생태학 유토피아를 추적하면서, 네 가지 시기의 역사적 단계로 그것을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계몽주의의 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시된 것은 자연의 개발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낙관주의의 사고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를 가리키는데, 산업 혁명과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의 상황을 지칭한다. 세 번째 단계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시기를 가리키며, 네 번째 단계는 1950년대 이후, 다시 말해서 독일의 경제 기적을 이룩한 시기를 지칭한다.

 

헤르만트는 첫 번째 계몽주의의 단계를 개진하면서, 장 장 루소를 생태학의 사상가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루소야 말로 새로운 엘로이즈에서 묘사되듯이, 구속되지 않는 농부의 삶을 찬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헤르만트의 입장은 하자를 드러내고 있다. 가령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루소의 슬로건은 사회 계약 이론 등과 같은 루소 사상의 전체를 고려한다면, 지엽적인 사항에 불과하다. 헤르만트는 모렐리의 자연 법전을 생태학에서 긍정적 요소를 찾을 수 있는 문헌으로 간주하며, 가령 영국의 자코뱅주의자를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실제로 영국의 진보적 개혁주의자의 글 가운데에서 시골의 정원을 예찬한 경우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두 번째 단계, 다시 말해 19세기의 생태학의 사고는 주도적 사상으로 드러난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과거 지향적 자세를 취하면서 더 나은 삶과 자연을 생각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진보주의와 함께 자연을 보존하려는 생태를 강조하는 반동주의의 성향 역시 부분적으로 존재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도시화의 분위기와는 달리 19세기 초반의 독일에서는 농업중심의 소도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헤르만트는 모더니즘의 성향의 문학 속에 도사린 한계를 지적하며, 19세기의 생태적 사고의 흔적을 찾는다, 가령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의 동물보호 운동이라든가 에버네저 하워드 Ebeneser Howard의 정원도시에 관한 구상에 관한 사항 또한 언급하고 있다.

 

세 번째로 헤르만트는 20세기 초반의 시기에 발전된 생태주의 사고를 개진한다. 이때 두 가지 성향이 지적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라든가, 프랑스의 큐비즘 내지 러시아의 구성주의의 성향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묵시록의 면모를 드러내는 표현주의 내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한 사고인데, 이는 표현주의 초창기에 나타난 과학 기술 숭배 현상으로부터 등을 돌리려는 성향을 가리킨다. 가령 20세기 표현주의자들은 기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곤 하였다. 이러한 성향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라든가 진보주의를 막론하고 주어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예컨대 기술을 반대하는 디스토피아의 성향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첨예화되었지만, 1050년대 이후 경제 기적 이후의 시기에는 유럽에서 거의 약화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생태학적인 패러다임이 거대한 범위로 퍼져나가게 된지역은 바로 미국이었다. 이를테면 라엘 카슨 Rachel Carson, R. 버크민스터 풀러 R. Buckminster Fuller, R 에어리크 Paul R. Ehrlich그리고 고든 R 테일러 Gorden R. Tayler 등과 같은 인물을 예로 들 수 있다. (Saage 2003, 454 - 480). 당시에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은 생태학적인 문제의 근원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행동 심리의 차원에서 그리고 인간학적으로 구명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 그리고 인간이 걸어온 자취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 사회당 NSDAP” 내부에서도 생태주의의 사고가 부분적으로 싹을 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결코 생략될 수 없다. (Hermand 1988, 24f).

 

네 번째로 생태학의 사고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면서 사회의 이슈로부터 이탈하려는 자들의 공동체 운동이다. 1965년부터 미국에서는 수민은 시골 공동체가 생겨났는데, 이러한 운동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테오도어 로작 Theodore Roszak, 개리 스나이더 Gary Snyder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운동은 헤르만트에 의하면 하나의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독일에서는 녹색당이 70년대 말부터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요약허건대 생태학의 유토피아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카테고리를 언급할 수 있다. 1. 묵시록의 차원에서의 정화 운동은 녹색의 유토피아의 사고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가령 많은 작품들은 핵전쟁의 위협을 다루는 것은 이러한 입장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2. 동화, 사이언스 픽션, 동물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생태학적 유토피아를 구체화해야 한다. 우리는 미하엘 엔데의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다. 3. 저항 소설이 많이 나타나야 한다. 작가는 자연을 파괴하는 제반 현상에 대해 개별적으로 그리고 연대하여 저항하며 때로는 폭력도 불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들려주어야 한다. 4. 녹색의 유토피아는 자연 파괴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저항 운동을 다루어야 하고, 하나의 전체적 국가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물질의 의미 있는 변화를 거듭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헤르만트는 칼렌바크의 작품을 들고 있다.

 

 

 

헤르만트의 책은 특히 첫 번째 계몽주의의 단계에 있어서 약간의 하자를 드러낸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놀라운 연구로 평가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생태학의 유토피아에 있어서 모범으로 활용되곤 한다. 특히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현대의 생태계 파괴의 근원적 이유는 헤르만트에 의하면 인간과 인간 행위에서 뿐 아니라, 제반 국가들의 정치적 시스템 내지 그들의 전략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유토피아의 전략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헤르만트는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생태계 파괴 및 이러한 파괴를 불러일으킨 주체를 분명히 인식하야 하며, 이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현대인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수동적으로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외냐하면 생태적 인간은 헤르만트에 의하면 단순히 자연의 물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일 외의 다른 무엇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Hermand 1991, 189).

 

 

참고 문헌

 

 

 

- Hermand, Jost: Der alte Traum vom neuen Reich. Völkische Utopien und Nationalsozialismus, Frankfurt a. M. 1988.

- Hermand, Jost: Grüne Utopien in Deutschland. Zur Geschichte des ökologischen Bewußtseins, Frankfurt a. M. 1991.

- Ruyer, Raymond: L’Utopie et les utopies, Paris 1950.

- Saage, Richard: Utopische Profile Bd. 4, Widersprüche und Synthesen des 20. Jahrhunderts, Münster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