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자먀찐의 우리들 (3)

필자 (匹子) 2022. 10. 7. 20:41

12. D-503, 자신이 꼭두각시라는 것을 깨닫다: 갑자기 I-330과 만났던 오래된 집이 수상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D-503은 어느 날 옷장에 몸을 숨겨서 그 집의 지하로 잠입해봅니다. 그 집의 지하는 알고 보니 지하에서 활동하는, 체제에 반대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은닉장소였습니다. I-330 역시 그들 단체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I-330은 일부러 과학자이자 로켓 기술자 D-503을 야권단체에 포섭하기 위하여 접근했을까요, 아니면 우연의 일치 때문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부차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주인공에게 중요한 것은 그미의 접근 의도가 아니라, 주어진 권력의 지형도이며, 그미의 구체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I-330은 투명한 노란색 명주 원피스를 길친 채 당황함을 느끼는 주인공 앞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무엇이 다른 무엇과 구별된다는 뜻이지요. 독창성은 동일함을 파괴시킵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천박하다고 표현한 바 있는 것은 오늘 날 우리들이 의무를 완수하는 일을 뜻하지요.” 말하자면 인간 숫자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행동입니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을 통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음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13. 주인공, 야권단체에 가담하다: 뒤이어 그는 단일 국가와 비밀리에 맞서는 야권 단체에 가담합니다. D-503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주선 개발 작업에 사보타주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이를 눈치 채게 되고, 주인공의 사보타지는 도중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놀라운 것은 I-330가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주인공을 힐난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권 단체 MEPHI는 “선을 베푸는 자”의 재투표에서 만장일치를 방해하려고 어떤 거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거사는 U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모든 일을 조종하는 여자 U를 순식간에 때려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U는 주인공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합니다. 즉 U는 남몰래 주인공을 사모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U는 자신의 옷을 벗습니다. 자신을 죽이기 전에 한 번이라도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나눌 때에 당국의 군인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칩니다. 다행히도 주인공은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러나 D-503은 다시금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유일 국가는 D-503이 체제를 비판하고 비밀리에 야권단체와 상종했다는 사실을 모조리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강제로 우생학 영역의 뇌수술을 받게 됩니다. 나중에 그는 일기장에 이른바 “찢겨진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기술합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유일 국가의 일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14. 애인, I-330은 어떠한 여자인가? 애인 I-330은 어떠한 인물일까요? 소설은 오로지 주인공의 측면에서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I-330에 관한 사항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미는 두 개의 힘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엔트로피이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입니다. 전자는 성스러운 휴식과 행복한 균형을 제공하는 반면에, 후자는 균형의 파괴 그리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끝없이 전개되는 운동을 추구합니다. 그미는 처음부터 주인공을 사랑한 게 아니라, 오로지 로켓에 접근하기 위하여 주인공에게 접근했습니다. 어쨌든 I-330은 위험을 무릅쓰고, “선을 베푸는 자”에 대항해서 투쟁합니다. 그미는 “선을 베푸는 자”가 거주하고 있는 방을 찾다가, 미로에서 길을 잃어 결국 체포당합니다. 그미는 무참하게 고문당합니다. 지배자는 고문을 통하여 야권 세력의 주동자를 찾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때 주인공 D-503은 그미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15. 또 다른 여성 O-90: 주인공과 I-330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애정 관계가 성립할 수도 자리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국이 그들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는 주인공과 O-90이라는 여성과의 애틋하고도 이타적인 사랑이 지엽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O-90은 당국에 의해서 파견된 하녀입니다. 그미는 과학자 두 사람, 즉 D-503 그리고 R-13의 몸종으로 일하는 하녀인 셈이지요. O-90이 두 남자와 번갈아가며 동침하는 것은 오로지 당국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미는 D-503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날 D-503이 다른 여자, 즉 I-330을 사랑한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 O-90은 극도의 슬픔에 사로잡혀 주인공을 떠납니다. 그미는 주인공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만약 임신 사실이 당국에 적발되면, 스스로 목숨을 잃게 되는데도, O-90은 이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중에 주인공은 O-90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미 혼자라도 도시 국가를 떠나야 한다고 O-90을 설득합니다. 그미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험에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칠 수 없다고 항변하지만, 결국 주인공의 요구를 받아들여, 도시 국가 밖으로 탈출합니다. D-503은 처형당하지만, 그의 아이는 미래에 어떠한 과업을 수행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O-90이 출산할 아이는 찬란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인물인 셈입니다.

 

16. 전체주의 체제: 오늘날의 관점으로 고찰할 때 작품은 일견 하찮은 사이언스 픽션의 줄거리를 연상하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1920년의 시기에 거대한 전체주의적 체제를 구상했다는 자체가 과히 예언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가 발전된 과학 기술을 최대한 이용하여, 개개인을 통제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사항은 자먀찐에 의해서 처음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회색의 푸른 단지의 모든 삶은 합목적적인 규칙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습니다. 정방형의 건물,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로는 국가가 얼마나 하나의 질서를 철칙으로 내세우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반증합니다. 개개인들은 동일한 못을 걸치고, 사회적 엔지니어링의 부속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는 “이상적 부자유의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수천 내지 수만의 푸른 유니폼의 사람들은 가슴에 황금의 표시를 부착한 채 행군하고 있습니다. 대열을 지어 걸어가는 개개인들은 마치 거대한 강물 속에서 흘러가는 물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17. 사유재산제도는 없다.: 자먀찐의 유일 국가에서는 사유재산제도가 없습니다. 모든 재산은 국가의 소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가에서의 모든 생산은 주인공 D-503과 같은 국가 소속의 기술자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제반 사업이라든가 산업 전반에 관한 시스템 등은 작품 내에서 세부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주인공의 인테그랄이라는 로켓 제작과 관련된 부분적 사항만을 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유일 국가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서 모든 경제적 사업을 중앙집권적으로 관장하고 통솔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첨단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과거에는 과학 기슬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노동 시간의 절감을 위해서 활용된 반면에, 이제 그것은 유일 국가의 근본적 동력과 다를 바 없습니다.

 

18. 테일러의 이론에 의거한 하루의 일과: 유일 국가의 하루 일과는 처음부터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주인공 “나”는 하루의 일과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세밀하게 기록한 전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리데릭 윈슬로 테일러 Frederic Winslow Tayler입니다. 테일러는 하루 일과의 최적의 효능을 미리 설정하여, 이를 실험을 통해서 최적의 효율성을 증명해낸 바 있습니다. 테일러의 연구가 있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지, 자신의 노동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고민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루의 일과는 테일러의 엄격한 시간 절약을 위한 학문적 원칙에 의해 처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나”는 테일러를 “이전 시대의 가장 재능 있는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칸트라는 이름을 지닌 철학자에 관해서 수없이 많은 글을 써서 도서관의 책장을 가득 채웠는데, 테일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합니다. 물론 테일러의 재능에는 어떤 한계가 있습니다. 즉 테일러는 인간 삶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오로지 24 시간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결론을 도출해내었기 때문입니다. 자먀찐의 유일 국가는 침대에서 기상하는 시간, 음식을 제대로 씹어 먹는 데 필요한 식사 시간 등 모든 것을 테일러의 학문적 원칙에 의해서 정해놓고 있습니다.

 

19. 국가를 찬양하는 종교, 예술 그리고 시인들: 유일 국가에서 종교는 하나의 과제만을 추구합니다. 교회는 유일 국가를 경배하는 예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전의 세계 사람들이 미지의 어리석은 신을 숭배했다면, 유일 국가의 사람들은 모든 권능을 지닌 국가를 위하여 희생물을 바칩니다. 그들은 200년간의 전쟁과 승리를 기념하는 예식을 올릴 때, 체제 파괴자 한 사람을 색출해서 그를 희생양으로 바칩니다. 선을 베푸는 자는 유일국가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간에 논문, 송시, 성명서 등을 통하여 유일 국가의 찬란함을 칭송해야 하는 게 하나의 의무사항입니다.

 

미래 예술의 매개체는 기계의 세계라고 합니다. 이는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 그리고 보그다노프의 『붉은 혹성』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것으로서 엄격한 질서에 의해서 작동되는 기계야 말로 찬란한 예술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국가는 심지어는 음악조차도 기계적 메커니즘의 이성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여러 전선은 서로 엉켜 있으며, 음악 사이로 테일러의 공식이 은근히 전파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음악을 듣는 순간에도 당국의 강령을 무의식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전체주의의 엄격한 질서는 예술의 고유한 영역마저 침범하고 있습니다. 시인들은 더 이상 고상한 영역에서 자연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계에 의해서 작동되는 행군가에 맞추어 행군하곤 하며, 국가를 찬양하는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