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자먀찐의 우리들 (1)

필자 (匹子) 2022. 10. 7. 20:40

1. 자먀찐의 디스토피아: 친애하는 S, 이제 전체주의 사회에 출현한 부정적 유토피아 내지 디스토피아의 작품들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디스토피아의 작품들은 19세기 말부터 서서히 태동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바로 이 시기에 거대한 국가의 체계가 완성되었으며, 거대한 국가적 권력의 힘이 개개인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흔히 디스토피아 문학으로 체계화되고 있지만, 디스토피아, 즉 부정적 유토피아 속에는 주체의 근본적인 자유에 해당하는 자기 보존의 욕망이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유토피아는 대아 유토피아로 명명될 수도 있습니다. 대아 유토피아는 개인의 최소한의 권리 내지 자유를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출발합니다. 그러한 한, 주체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의 의향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일련의 디스토피아 문학 작품을 다루어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자먀찐의 『우리들』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자먀찐의 작품은 거대한 전체주의 국가가 어떻게 개별적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억압하는가? 하는 사항을 처음으로 전해주는 디스토피아의 문헌입니다.

 

2. 자먀찐의 삶 (1):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은 1884년 겨울에 중부 러시아의 레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일은 1월 20일, 아니면 2월1일이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정교의 수도사이자 김나지움 교사로 일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탁월한 피아니스트였다고 합니다. 레베장은 톨스토이 그리고 투르게네프 등이 문학 작품에서 묘사한 바 있는 중부 러시아에 위치한 소도시입니다. 그곳에는 말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렸는데, 그 근처에는 허풍쟁이 재담가가 놀랍고도 힘찬 러시아어로 만담을 들어놓고, 집시들이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마술을 보여주곤 하였습니다.

 

자먀찐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고독하게 보내면서,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습니다. 이때 즐겨 읽은 책은 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유년의 자먀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진리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른바 회의주의의 신념이었다고 합니다. 1892년 자먀찐은 고향의 도시 그리고 보로네시에 있는 김나지움을 다녔습니다. 1892년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선박 제조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대학생으로서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여, 정치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물론 그가 정당에 다감한 것은 정치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구체제의 권위에 대한 반발 내지는 반향 때문이었습니다. 뒤이어 자먀찐은 소련 볼셰비키 당에 가입합니다. 당시 주어진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장 저항적인 당은 볼셰비키였다고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자먀찐은 볼셰비키 당을 떠납니다.

 

3. 자먀찐의 삶 (2): 1905년 12월에 자먀찐은 여러 정치 행위로 인하여 투옥됩니다. 이듬해 초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레베장으로 강제 추방당합니다. 그렇지만 자먀찐은 몰래 페테르부르크로 잠입하여 당국의 눈을 피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기술자의 자격을 취득합니다. 처음에 그는 성 페테르부르크의 조선 기술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08년부터 작가로서 작품의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911년 당국은 그를 범법자로 체포하여 두 번째로 추방 명령을 내립니다. 그가 두 번째로 추방되어 머물러야 할 장소는 성 페테르부르크 근처의 다차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자먀찐은 이곳에 머물면서 집필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1913년 자먀찐은 당국으로부터 사면 조처를 받았으나, 건강이 그를 괴롭힙니다. 자먀찐은 이 시기에 이중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선소 기술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로서 생활하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1916년에는 영국의 글래스고우, 뉴캐슬, 선더랜드에서 러시아 해군의 항해를 위한 빙하 해체 작업을 선두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 자먀찐은 「세상 끝에서」라는 풍자의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이 다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Saage 100). 말하자면 작가는 러시아 군대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다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발발하게 되자, 그에 대한 혐의는 어느새 사라집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 앞에서 당국은 일개 작가의 작은 혐의에 골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자먀찐의 삶 (3): 1917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자먀찐은 우회로를 통하여 러시아로 돌아옵니다.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그는 러시아에서의 새로운 문화적 토대를 쌓는데 공헌합니다. 1920년에 자먀찐은 전투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령 혁명이 급진적으로 진척된다고 해서 개인의 모든 자유마저 억압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비록 20년대에 그가 범 러시아 작가동맹의 대표로 일하는 등 문화부의 최전선에서 활동적으로 일했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비판적 회의적 사고가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서 개개인이 무조건 희생해도 좋은가? 하는 물음과 관련됩니다.

 

20년대 초부터 당 내부에도 어떤 수정주의적 경향을 지닌 체제비판의 지식인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922년에 자먀찐은 160명의 작가들과 함께 체포되어 추방이라는 경고 처분을 받습니다. 1929년에 소련 공산당은 그를 부르주아의 혐의를 지닌 체제비판적인 작가라는 이유로 적으로 규정하며, 강제수용소로 송치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는 문우였던 막심 고리키의 도움으로 1931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위대한 작가, 자먀찐은 러시아인으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컨대 파리에 머물면서 소련 당국의 탄압에도 결코 소련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먀찐은 1937년에 소련의 적으로 몰려서 가난과 고독을 벗 삼아 살다가 쓸쓸히 유명을 달리합니다.

 

5. 볼셰비키 정당의 당원인 자먀찐이 소련의 적대자로 박해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습니다. 어째서 볼셰비키 정당의 당원인 자먀찐이 소련의 적대자로 박해 당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문제는 그가 소련 혁명이 발발할 무렵에 새롭게 정착된 소련의 권력 구조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사실입니다. 볼셰비키는 결코 혁명의 해방을 위한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눈앞의 권력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게 자먀찐의 지론이었습니다. 1918년에 자먀찐은 백군에 대한 적군의 테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백군이 테러를 장행하더라도 이에 대해 맞불 작전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먀찐이 주어진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무조건적으로 이상적 구상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먀찐이 당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 공산주의의 이상이 경제적 측면에서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수정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몇몇 예술가들은 예술적 전위주의에 함몰되어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자먀찐은 미하일 플라타노프라는 가명으로 다음의 사항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즉 브레스트-리토브스크의 평화, 러시아 왕조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동상의 파괴 그리고 사회적 비판 세력에 대한 당국의 억압 등이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이 러시아의 사회와 문화를 모조리 장악하려고 했을 때 이에 대해 제동을 걸면서 예술가의 자율성과 작가의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은 사람이 바로 자먀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