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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뒤렌마트의 재판관과 그의 형리

필자 (匹子) 2017. 12. 29. 09:40

친애하는 Y, 오늘도 연극 공연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그래도 수업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학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뿐 아니라, 외국어 공부 그리고 문학 수업 등에서 충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오늘 일부러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Friedrich Dürrenmatt, 1921 - 1990)의 탐정 소설, 『재판관과 그의 형리 (Der Richter und sein Henker)』를 선택해 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1952년에 발표되었습니다.

 

1950년 뒤렌마트는 불과 서른이 채 되지 못한 젊은이였습니다. 작가 초년생이었지요. 이때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여러 편의 탐정 소설을 집필하였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탐정 소설 집필을 하나의 습작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탐정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극작가가 평생 고뇌했던 주제가 은밀히 배여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라는 주제입니다. 나중에 뒤렌마트는 「연극의 문제들 (Theaterprobleme)」이라는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술은 오로지 아무도 추측하지 못하는 바로 그곳에서 관철될 수 있다.”

 

작품의 줄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은 수사반장 베를라흐입니다. 오랫동안 일해온 그는 이제 병든 노인이 되어 있습니다. 젊은 시절 터키에서 탐정으로 일할 때 그는 가스트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가스트만은 독일 출신의 건달 내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는 수사반장에게 하나의 내기를 제안합니다. 가스트만은 차제에 어떤 범행을 저지를 것인데, 이에 대한 물적 증거를 찾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물적 증거가 발견되면, 수사반장이 승리를 구가하고, 그렇지 못하면 가스트만이 이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수사반장은 승리를 구가하기는커녕, 가스트만이 무슨 살인극을 자행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베를라흐는 시간이 별로 없음을 절감하고 탄식을 터뜨립니다. 그는 우연히 건달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타인의 행위를 미리 점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 만사에 어떤 우연이 작용하고, 이러한 우연이 결국 뒤이은 범행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가스트만은 베를라흐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때 그는 바로 그 때문에 어떤 완전범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가스트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활하게 법망을 빠져나갔습니다. 구속 직전에도 그는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내세웠습니다. 경찰은 번번이 무혐의로 그를 훈방 조처해야 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마피아 단체의 보호를 받고 있는 거물급 인사가 바로 가스트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더 무법자로 배후에서 활약합니다. 수사반장은 가스트만을 무조건 체포해야 한다고 여러 번 진술했으나, 이러한 진술은 강력 부서에서 전혀 효력을 떨치지 못합니다. 결정적 혐의가 포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를라흐는 범행의 단서를 얻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동료가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수사반장은 정년퇴직 직전의 나이에 이릅니다. 이 시기에 그는 비로소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료 살해범이 자신의 부서에서 일하는 찬츠라는 경찰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베를라흐가 언젠가 한번 찬츠에 대해 의혹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찬츠에 대한 의혹을 지금까지 철저하게 부정해 왔습니다. 모든 연쇄 살인극들은 분명히 가스트만의 교묘한 조작과 계획과 관계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베를라흐는 가스트만과의 내기에 집착했으므로, 그의 판단력은 오랫동안 흐려 있었습니다. 아니, 확고한 신념이 그로 하여금 다른 가능성을 감지하지 못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진짜 범인을 알아차렸으나, 불행하게도 비명횡사하고 맙니다. 찬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를라흐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죄를 찾는 “재판관”으로 살아온 수사반장은 “형리”에 해당하는 자신의 동료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찬츠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해 나타난 것이므로,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발표된 탐정 소설 『의혹 (Verdacht)』에서 뒤렌마트는 경찰관 찬츠의 삶을 다시 묘사합니다. 수사반장 베를라흐를 살해한 그는 도주하는 과정에서 다시 목숨을 잃습니다.

 

수사반장 베를라흐는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시메논 (Simenon)의 메그레트, 미국작가 챈들러 (Chandler), 하머트 (Hammett), 로스 맥도날드 (Ross Macdonald) 등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들입니다. 혹자는 수사반장 베를라흐를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Friedrich Glauser, 1896 - 1938)의 소설에 등장하는 경찰관 스투더와 유사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중요한 사항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뒤렌마트의 범죄 소설이 전통적인 그것과 약간 다르다는 게 바로 그 사항입니다. 전통적 소설에서는 세상 그리고 인간의 태도가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뒤렌마트의 소설에서 작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연입니다. 그렇기에 개개인의 범행 의도라든가 세상의 모순점 등은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수사반장 베를라흐는 정의의 원칙에 대해서 오로지 개인주의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 방식은 자신의 적대자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전통적 범죄 소설에서 수사반장은 범인을 체포하여 죄를 척결하겠다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베를라흐는 처음부터 범인 체포를 하나의 내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령 작품 『의혹』에서 수사반장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일하던 의사에게 과거의 범행을 실토하라고 요구했을 때,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법은 법이 아니에요. 법은 권력일 따름이지요.” 수사반장 베를라흐는 의사의 이러한 말에 반박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그저 나치 추종자인 개인 한 사람에게 복수극을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뒤렌마트는 세 번째 작품 『약속 (Das Versprechen)』에다 “탐정 소설에 대한 진혼곡”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약속』이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와 결별하기 위한 마지막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에서 수사반장은 유괴 살인범을 잡기 위하여 어느 용의자에게 덫 하나를 놓습니다. 그러나 용의자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용의자는 그곳으로 오기 직전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수사반장은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 범인을 잡으려고 함으로써, 자신의 월급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월급은 헛된 기다림의 대가에 불과합니다. 뒤렌마트는 「사고 Die Panne」라는 작품을 끝낸 뒤에 더 이상 탐정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Y, 뒤렌마트의 작품에서 죄의 근원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세상사의 우연 그리고 기이한 판단 착오에 의해서 죄악이 척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사반장의 살해자가 추적당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것도 하나의 우연에 불과합니다. 『노부인의 방문 (Der Besuch der alten Dame))』도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등장인물 “일”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것은 노부인의 잔혹한 복수심도, 귈렌 마을 사람들의 비겁한 태도 때문은 아닙니다. 죄의 근원은 개개인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황금만능주의와 이에 굴복하는 세상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뒤렌마트는 개별 인간의 범죄보다는 이러한 범죄를 야기하는 세계의 거대한 톱니바퀴를 주제화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상기한 내용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숙지해야 할 것입니다. 즉 뒤렌마트 작품의 어떠한 등장인물도 뒤렌마트 자신의 견해를 백퍼센트 반영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