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엔첸스베르거의 '양들에 대한 늑대의 변호'

필자 (匹子) 2024. 10. 2. 11:07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1929 - 2022)는 1929년 알고이에 있는 카우프보이렌에서 태어나다. 그의 본명은 안드레아스 탈마이어이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그는 에어랑겐, 함부르크, 프라이부르크, 소르본느 등지에서 문학, 어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다. 1955년 클레멘스 브렌타노 시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1955년에서 1957년 사이에 남독 방송국의 프로듀서, 울름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다. 1960년에서 1961년 사이에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사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1963년 잡지 『코스 북 (Kursbuch)』 주편집자로 일하다. 엔첸스베르거는 1964년에서 1965년 사이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시학을 강의하다. 1957년에는 미국을, 1963년에서 1964년 사이에 소련을, 1968년에서 1969년 사이에는 쿠바를 방문하다. 그는 현재 노르웨이와 로마에서 살고 있다. 엔첸스베르거는 수많은 사회비판적인 글을 발표하였으며, 60년 후반부터 재야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서사시 『타이타닉 호의 몰락』은 서구 문명과 생태계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양들에 대한 늑대의 변호

 

독수리가 물망초를 뜯어야 하는가?

너희는 자칼에게서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가 허물벗기를? 늑대에게서? 스스로

자신의 이빨을 뽑아야 하는가?

소련 정치부원 그리고 교황들에게서

무엇이 네 마음에 들지 않는가?

너희는 거짓된 TV 화면 속에 담긴

무엇을 멍하니 바라보는가?

 

누가 도대체 장군의 바지에 묻은

피 자국의 줄무늬를 꿰매어 주는가? 누가

고리대금업자 앞에서 수탉을 가르는가?

누가 꼬르륵 허기진 배 위에다 자랑스레

양철 십자가를 달고 있는가? 누가

팁, 은화 한 닢, 침묵에 대한 사례금을

받아드는가? 도둑맞은 자는

수없이 많은데, 도둑은 적다; 누가

그들에게 갈채를 보내고, 누가

휘장을 달아주는가, 누가

거짓말을 애타게 그리워하는가?

 

거울 속을 들여다보라: 비겁하고,

진리의 고통에 대해 머뭇거리며,

배움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사고를

늑대들에게 떠넘겨버리고,

코걸이는 너희의 가장 귀중한 장신구,

현혹을 알기에는 어리석고, 위안 받기에는

너무나 천박하구나, 모든 협박도

너희들에게는 그저 온유할 뿐이다.

 

너희 양떼들은 남매들이지만,

비유하자면, 까마귀 떼와 비슷하다:

너희들은 상대방을 눈멀게 하니.

그러나 늑대들에게는

형제애가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무리 지어 다니니.

 

강도들은 축복 받으리라: 너희가

성폭력에 초대받으면서,

복종의 썩은 침대에 너희는

스스로 몸을 던지니까. 너희는

애걸하며 거짓말한다. 찢겨지기를

너희는 원하는구나, 너희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Verteidigung der Wölfe gegen die Lämmer von Hans Magnus Enzensberger:

Soll der Geier Vergißmeinnicht fressen?/ Was verlangt ihr vom Schakal,/ daß er sich häute, vom Wolf? Soll/ er sich selber ziehen die Zähne?/ Was gefällt euch nicht/ an Politruks und an Päpsten,/ was guckt ihr blöd aus der Wäsche/ auf den verlogenen Bildschirm?

Wer näht denn dem General/ den Blutstreif an seine Hose? Wer/ zerlegt vor dem Wucherer den Kapaun?/ Wer hängt sich stolz das Blechkreuz/ vor den knurrenden Nabel? Wer/ nimmt das Trinkgeld, den Silberling,/ den Schweigepfennig? Es gibt/ viel Bestohlene, wenig Diebe; wer/ applaudiert ihnen denn, wer/ steckt die Abzeichen an, wer/ lechzt nach der Lüge?

Seht in den Spiegel: feig,/ scheuend die Mühsal der Wahrheit,/ dem Lernen abgeneigt, das Denken/ überantwortend den Wölfen,/ der Nasenring euer teuerster Schmuck,/ keine Täuschung zu dumm, kein Trost/ zu billig, jede Erpressung/ ist für euch zu milde.

Ihr Lämmer, Schwestern sind,/ mit euch verglichen, die Krähen:/ ihr blendet einer den andern./ Brüderlichkeit herrscht/ unter den Wölfen:/ sie gehn in Rudeln.

Gelobt sein die Räuber: ihr,/ einladend zur Vergewaltigung,/ werft euch aufs faule Bett/ des Gehorsams. Winselnd noch/ lügt ihr. Zerrissen/ wollt ihr werden. Ihr/ ändert die Welt nicht.

 

(질문)

1. 엔첸스베르거의 시는 5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형식적인 면을 고려하여 두 단락으로 나누어 특성을 설명하세요.

2. 첫 번째 단락에서 시인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어법은? 이러한 어법은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요?

3. 제 1연에서 “너희”는 어떠한 사회 계층 사람들로 분류될 수 있습니까?

4. 제 2연에서 “은화 한 닢”을 받았던 자는 누구인가요? 어떠한 대가로 그가 그것을 받았습니까?

5. 제 3연에서 “비겁하고,/ 진리의 고통에 대해 머뭇거리며,/ 배움으로부터 등을 돌”린 족속들은 양들을 가리킵니다. “진리의 고통”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

6. 제 4연에서 양들이 서로 이간질하고, 늑대에게 형제애가 자리하는 까닭은?

7. 시인은 어째서 양 대신에 늑대를 찬양하고 있는가요? 이로써 말하고자 하는 작품 의도는 무엇일까요?

 

(해설)

상기한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60년대 서독의 경제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서독 인들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거의 모두가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늑대 (권력자)와 양 (소시민) 사이의 갈등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로써 과거의 끔찍한 일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그들의 정치가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독일의 심리학자 A. 미첼리히 (A. Mitscherlich, 1908 - 1982)는 아내, 마르가레테와 함께 쓴 책,『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 (Die Unfähigkeit zu trauern)』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독일인들은 라인 강의 기적을 통한 부의 획득으로 인하여 과거 나치 시대의 참상을 망각한다. 이로써 그들은 더 이상 과거사의 고통을 슬퍼할 줄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착한 양과 사악한 늑대의 통상적인 개념을 뒤집고 있습니다. 양들은 자신의 고유한 선량한 본성을 상실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비판력을 내팽개쳤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제 1연과 제 2연에서 권력에 혹하는 양들에게 경종의 질문을 던집니다. “독수리가 물망초를 뜯”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독수리”, “자칼” 등의 근본적 속성을 망각합니다. 이는 늑대가 “스스로 자신의 이빨을 뽑아야” 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거짓된 TV 화면 속”을 멍하니 바라보며, 권력자들을 애호하려고 합니다.

 

제 2연에서 시인은 질문의 강도를 더욱 높입니다. 어리석게 행동하는 주체를 질타하기 위해서 시인은 “누가” 그러한가? 하고 묻습니다. “누가 꼬르륵 허기진 배 위에다 자랑스레/ 양철 십자가를 달고 있는가?” 국가를 위해서 일하다 훈장을 받아든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것은 다만 표시일 뿐, 자신의 굶주림을 달래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을 받아드는 사람은 어리석은 유권자이며, “은화 한 닢”을 받아든 자는 스승을 배반하고 예수를 밀고해버린 유다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침묵에 대한 사례금”을 받아 챙길까요? 어쩌면 권력자의 “거짓말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제 3연에서 시적 자아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소시민들에게 “거울 속을 들여다보라”고 명령합니다. 이로써 그들의 속성은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어리석은 양들은 첫째로 “비겁”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눈앞의 고통이 두려워 진리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셋째로 그들은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생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시간만 나면 그저 늑대에 대해 알랑거리기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가장 귀중한 장신구”는 코걸이입니다. 어리석은 양들은 “천박”하기 짝이 없으며, 어떠한 협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제 4연은 어리석은 양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양떼들”이 궁극적으로 “까마귀 떼와 비슷”한 까닭은 남매들끼리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이간질한 자들은 다름 아니라 늑대들이 아닌가요? 이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늑대들은 “무리 지어” 돌아다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들일까요? 어리석은 양들일까요? 양들은 너무나 어리석기 때문에, “복종의 썩은 침대에”서 스스로 겁탈 당하려 합니다. 어리석은 소시민들이 눈앞의 작은 이득에 눈이 멀어서, 동족을 배반하고, 진리를 외면하며 거짓을 일삼는다면, 세상은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