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페터 후헬
폭력의 비호 하에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만,
나는 죄인의 무죄를 받아들였다.
강자의 권리로써
정당성을 지닌 채
판사는 무뚝뚝하게 내 서류를 뒤적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관대한 처분을
전혀 원치 않은 채
나는 몰락하는 달의 가면 속 한계 앞에서
재판정에 서 있었다.
벽을 노려보다가
나는 기사 (騎士)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바람은
그의 눈을 꽁꽁 묶어두었고,
엉겅퀴의 포자 (胞子)들이 덜거덕거렸다.
바람은 오리나무 아래에서 강을 부추기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여울 속에서
의연히 걸어가지는 않는다.
물은 대다수의 발아래에 놓인
돌들을 이리저리 옮겨놓는다.
벽을 노려보는 동안에
피 묻은 그 연기를
그래, 여명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구나,
나는 판사의 판결을 듣고 있었다,
누렇게 바랜 서류 속에서
나온, 찢겨진 문장들을.
판사는 마지막에 서류철을 덮었다.
알 수 없구나,
무엇이 그의 얼굴을 실룩이게 했는지.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무기력함이 아울러 보였다.
냉혹함은 내 이빨을 시리게 했다.
Das Gericht vom Peter Huchel:
Nicht dafür geboren,/ unter den Fittichen der Gewalt zu leben,/ nahm ich die Unschuld des Schuldigen an.
Gerechtfertigt/ durch das Recht der Stärke,/ saß der Richter an seinem Tisch,/ unwirsch blätternd in meinen Akten.
Nicht gewillt,/ um Milde zu bitten,/ stand ich vor den Schranken,/ in der Maske des untergehenden Monds.
Wandanstarrend/ sah ich den Reiter, ein dunkler Wind/ verband ihm die Augen,/ die Sporen der Disteln klirrten./ Er hetzte unter Erlen den Fluß hinauf.
Nicht jeder geht aufrecht/ durch die Furt der Zeiten./ Vielen reißt das Wasser/ die Steine unter den Füßen fort.
Wandanstarrend,/ nicht fähig,/ den blutigen Dunst/ noch Morgenröte zu nennen,/ hörte ich den Richter/ das Urteil sprechen,/ zerbrochene Sätze aus vergilbten Papieren./ Er schlug den Aktendeckel zu.
Unergründlich,/ was sein Gesicht bewegte./ Ich blickte ihn an/ und sah seine Ohnmacht./ Die Kälte schnitt in meine Zähne.
(질문)
1. 시인이 처한 정황을 설명해 보세요.
2. 제 4연에서 “기사”는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3. 시인은 판사를 어떠한 인간형으로 생각할까요?
(해설)
후헬의 시는 마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한 장의 조서로 꾸민 것처럼 보입니다. 시로 기술된 조서는 간결하고도 정교합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에 해당하는 재판 장면이지만, 시인은 과거의 시점으로부터 비판적으로 거리감을 취하고 있습니다. 재판의 진행 과정은 거의 생략되어 있고, 다만 본질적 부분으로 축약되어 있을 뿐입니다. 『손꼽는 나날들 (gezählte Tage)』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연에서 시인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전합니다. 재판정은 시인에게는 폭력의 하수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폭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폭력의 비호를” 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정법에 근거로 한 “강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판사의 태도는 자연법에 근거를 둔 피고의 태도와 절묘하게 부딪칩니다.
피고는 결코 관대한 판결을 원하지 않습니다. “몰락하는 달의 가면 속 한계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그는 지금까지 판사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판사는 전혀 피고의 예술적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몰락하는 달”이란 어떤 살아가는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실되는 순간을 암시하는지 모릅니다.
“벽을 노려보다가/ 나는 기사 (騎士)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바람은/ 그의 눈을 꽁꽁 묶어두었고,/ 엉겅퀴의 포자 (胞子)들이 덜거덕거렸다./ 바람은 오리나무 아래에서 강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현실적 암담함이 상징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현재 처한 정황은 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일순 마치 강 상류로 향해 마구 달리고 싶은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여기서 기사는 자연과 합일을 이룬 존재입니다. 자신의 명예와 개인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 시인으로 하여금 기사를 연상시키게 작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요? 판사의 처분에 그냥 자신을 맡겨버릴까요? 어차피 형량은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닌가요? 제 아무리 혼자 의연하게 정의를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벌 받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장강의 흐름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어떤 숙명을 거역할 수 있을까요? 그래, 나 자신은 (거대한 죄악의 시대의) 강물 속에 이리저리 치이는 수많은 돌멩이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주어진 현실 속에는 “피 묻은 연기”가 자욱하게 배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찬란한 “여명”이라고 명명해 왔던가요? 시인은 “허구적 이상” 속에서 부분적으로 용인해온 이상을 거짓으로 단정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판사는 모든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판결내리지 않습니다. 판결은 오래된 서류철에 이미 적혀 있는 내용에 불과합니다. 그래, 형량은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히틀러 시대나, 그 이후의 시대나 다를 바 없습니다. 비록 판결이 시인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시인은 처음부터 판사의 판결을 유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전: 박설호, 새롭게 읽는 독일 현대시, 한신대 출판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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